11. 담박함을 즐겨라
명아주를 먹고 비름나물로 창자를 채우는 자는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정결함을 귀중히 여기나,
비단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자는
종처럼 굽실거리고 노비처럼 비굴한 얼굴을 하는 것을 달게 여긴다.
대개 담박한 삶을 살면 뜻이 광명해지며,
기름지고 단 것을 좇으면 절개를 잃게 된다.
藜口莧腸者 多氷淸玉潔
袞衣玉食者 甘婢膝奴顔
蓋志以澹泊明 而節從肥甘喪也(전집-11장)
명아주나 비름나물은 산이나 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물들입니다.
이러한 나물을 즐겨 먹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며,
양심에 위배되는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양심에 위배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름진 음식과 화려한 옷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심보다 자신의 욕망을 중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욕망은 양심을 고려하지 않으니
양심이 심하게 가려져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기만 한다면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부귀를 누리는 자들에게 늘 비굴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갖고자 하는 물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자 늘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으며
자세나 몸짓 하나까지도 비굴함이 가득합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가진 자들에게
어찌 당당할 수 있겠으며,
어찌 양심과 정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논어]에서 공자님께서
“거친 밥에 물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어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도다.
정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부귀,
즉 양심을 위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서 얻는 부귀는
군자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남다른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아닙니다.
화려한 옷이 좋은 것을 몰라서 입지 않는 것도 아니고,
기름진 음식의 맛을 몰라서 먹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정의’를 위배하면서까지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을 뿐입니다.
[맹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고기 요리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며, 곰발바닥 요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런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없다면,
나는 물고기 요리를 버리고 곰발바닥 요리를 취할 것이다.
생명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정의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생명을 버리고 정의를 취할 것이다.”
군자라고 음식의 맛을 모르며,
명품이 좋은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더욱 즐길 뿐입니다.
‘불의’를 미워하기를 죽기보다 미워할 뿐입니다.
그러니 정의로운 삶을 통해 얻어지는
명아주와 비름나물을 참으로 즐길 줄 아는 자는,
당연히 맑고 정결함을 귀하게 여기는 자입니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옥처럼 정결한 ‘양심’ 그대로의 삶을
진심으로 즐기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나물반찬에서도 희열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순수한 양심을 즐기는 군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담박한 삶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에고는 담박한 맛을 참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늘 자극적인 맛을 찾아 천지를 헤맵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렇지 않으니,
담박하여 맛이 없는 맛을 즐깁니다.
에고는 불만족하나 참나는 만족합니다.
에고는 자극적인 맛에서 희열을 느끼나,
참나는 양심적인 삶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니 담박한 삶은 인심을 굶주리게 하나
양심을 더욱 드러나게 해줍니다.
만약 반대로 정의롭지 못한 부귀라 하더라도
이를 가리지 않고 탐하는 인심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그는 필시 양심을 지키는 곧은 절개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만고에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직 양심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을
화려한 옷과 기름진 음식보다 더 즐기는 군자라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에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부귀는 군자가
갖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비굴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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