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 23일 금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3.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방법

좁은 길, 좁은 곳에서는 한 걸음 양보하여
남이 걸을 수 있게 해주고,

맛있는 음식은 1/3을 덜어서
남에게 양보하여 맛보게 하라.

이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최고의 안락한 법이다.  

徑路窄處 留一步 與人行
滋味濃的 減三分 讓人嗜
此是涉世一極安樂法 (전집-13장)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좁은 길을 걷거나 좁은 곳을 걷다 보면,
은연중에 경쟁이 시작됩니다.

서로 빨리 가고 싶어도
장소가 좁아서 운신의 폭이 적으니,
자연히 서로 신경전이 붙게 되죠.

우리가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탈 때,
남과 경쟁하는 나 자신을 떠올려보면
이 상황이 충분히 짐작이 되실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나 중심’의 마음,
즉 인심人心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죄악시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심 그 자체로는 악이 아니거든요.

그러나 인심이 자신을 위해 적정선을 넘어설 때,
그것은 나와 남에게 고통을 주는 악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서경書經에서 전하길,
“인심은 오직 위태롭고,
도심은 오직 미묘하다!”라고 한 것입니다.

“인심은 오직 악하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위태롭다!”, “유혹에 취약하다!”,
“악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라고 지적할 뿐입니다.
 
군자는 인간의 욕망을
전적으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의 인심은 철부지 같은 존재이니,
늘 그 일거수 일투족을 깨어서 알아차려야만
우리가 걸어야 할 인간의 길을
무사히 걸을 수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왜 이렇게 악에 취약하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인심은 철저히
‘나 중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쉽게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좁은 길, 좁은 곳을 걷는 순간입니다.

소소한 일상의 한 순간이지만
우리 마음이 솔직히 드러나는 자리이니,
이 자리에서 한 번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을 내딛듯
속 시원하게 남에게 길을 양보해주라는 것입니다.

좁은 길, 좁은 곳에서
남에게 길을 내주는 마음,

이것은 일상의 작은 일이나,
우리 양심을 한 치 자라게 하고
위태로운 인심을 진정시키는 일상의 작은 도발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알아차림과 실천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소소한 일상의 판단과 행위가 쌓여서
우리의 인생을 만들어가니까요.

이와 상응할만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우리가 맛있는 요리를 먹을 때,
눈앞의 음식에 이성을 잃고
자신의 식욕의 충족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방향을 바꾸어보는 일입니다.

어떤 음식이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의 1/3을 덜어서 다른 사람에게 맛보게 해보십시오.
자신의 인심은 서운해 할지 모르나,
자신의 양심은 흐뭇해하며 한 치 자라날 겁니다.

처음엔 어색할지라도 정신을 모아서
한 번씩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 일상의 소소한 반란들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은 인간적 욕망의 충족 외에도,
우리의 내면에는 또 다른 희열과 만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양심의 만족’에서 오는 희열입니다.
지극한 조건 없는 안락감입니다.

채우고자 할 때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비우는 자만이 알 수 있는
야릇하고 미묘한 쾌감입니다.

이 안락감을 늘 누리는 삶이야말로
지극히 행복하고 안락한 삶이며,
늘 깨어있는 삶이고,
지혜롭고 양심적인 삶입니다.

흔쾌히 길을 양보해봅시다!
너그럽게 음식을 양보해봅시다!

혹시라도 그러한 일을 후회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면,
아직 우리의 내면이 철이 없어 그러는 것이니
미소를 잃지 않으며 잘 설득하고 타일러 봅시다.

이것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요령입니다.

2011년 12월 11일 일요일

훈민정음과 역易철학



지난주 주역 강의 중에서 요즘 '뿌리깊은나무' 드라마 때문에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에 대한 내용이 있어 발췌해 보았습니다.
훈민정음이 易의 철학을 근간으로 창제되었음을 설명해 주시는데
이걸 보면 드라마에서 소희와 함께 그려나가는 모습은 좀 오류가 있는 듯 싶더라구요.
모음 체계가 '하도'와 그대로 맞아 들어가는 모습은 경이롭다는 느낌마저 들더군요.

주역을 공부하시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다시 함 보시면 또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실 듯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12월29일 목요일 고전콘서트 (@교대역 토즈)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2. 영원한 삶을 사는 법

살아서는 마음자리를 관대하게 열어놓아,
사람들로 하여금 불평의 탄식이 없게 해야 한다.

죽어서는 그 혜택이 오래도록 흐르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없게 해야 한다.

面前的田地 要放得寬 使人無不平之歎
身後的惠澤 要流得久 使人有不匱之思(전집-12장)
 
[중용]에서 공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군자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길을 따라 걷다가
길에서 쓰러져야 하니,
나도 그만둘 수가 없다.”

군자는 양심을 따르는 길을 평생 걸어가다,
그 길에서 죽는 것을
일생의 사명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강압 때문도 아니요,
커다란 이익이 되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순수한 마음인 ‘양심’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회복한 군자는
이러한 양심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부득이 하게 이 길을 죽는 그날까지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양심’이 있는 한,
오직 이 길이 있을 뿐입니다.

일생 양심을 밝히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군자는,
살아있는 동안 양심이 원하는 대로
나와 남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와 남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길만을 걸으니,
남들에게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을 늘 알아차리고 살아가니,
자신에게만 행복한 일을 하지 않고
나와 남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선업을 즐겨 짓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행동은
돌아볼수록 양심의 가책이 되지만,
나와 남 모두를 위한 행동은
돌아볼수록 우리 모두에게 행복이 됩니다.

언제나 늘 행복을 주는 불멸의 선업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를 인도하고
필요한 이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베풀 것입니다.

남이 부러워할만한 위대한 일을 해야만,
불멸의 선업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과거 이 길을 걸으셨던 군자들께서 남기신
은택의 힘으로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길을 죽는 그 순간까지
포기하지 말고 걸어서,
이후 이 길을 걸어야 할 모든 이들에게
한없는 혜택을 줄 수 있는,
불멸의 선업을 쌓아야겠습니다.
그러면 살아서는 남들에게
한없는 만족을 줄 수 있으며,
죽은 뒤에도 필요한 이들에게
끝없는 혜택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랑(仁)과 정의(義), 예절(禮)과 지혜(智)를
4기둥으로 하는 불멸의 선업은,
시공을 초월하여 나와 남 모두에게
무한한 행복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이에게 웃음을 줄 것이며,
괴로워 울부짖는 이에게 평안을 줄 것이며,
비탄에 빠진 이에게 희망을 줄 것입니다.

그냥 삶의 매 순간,
우리의 순수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일체 만물은
타고난 ‘본성’ 그대로 순수하게 살아갈 때,
가장 참되고(眞) 선하며(善) 아름답습니다(美).

우리의 본성 그대로의 마음인 순수한 양심은,
우리가 자신만을 챙기고 남에게 고통을 줄 때 괴로워하며,
우리가 자신과 남을 모두 행복하게 할 때 크게 기뻐합니다.

2011년 11월 21일 월요일

한국인이여, 일상에서 깨어나라!


2000. 10. 4
월아산방(月牙山房)에서 윤홍식 삼가 씀

새 천년을 맞이한 인류는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수천 년 간 골방에 감추어 두고 쉬쉬해오던 인간들의 추한 ‘욕망’의 쓰레기들이 걷잡을 수 없이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현 문명이 직면한 최대의 위기는 그러한 문제점들을 기존의 방식대로, 즉 단순한 이데올로기나 제도의 변혁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정치ㆍ경제ㆍ환경ㆍ사회ㆍ교육ㆍ종교 등등 어느 분야 하나도 아픈 소리를 내지 않는 곳이 없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파하고 소외감에 떨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들이다.

하지만 걱정만 할 일은 아니다. 이 혼탁한 탁류 속에서도 맑은 물결이 미미하지만 조금씩 그 힘을 키워가고 있다. 언젠가는 이 모든 탁류를 정화하리라는 신념으로 말이다. 그것은 바로 여러 성자(聖者)들의 가르침, 즉 인간 내면의 순수한 영혼인 ‘참 자아’의 회복에 대한 관심의 증폭이다. 최근 들어 이러한 추세는 더욱 커져만 간다. 어쩌면 이러한 새로운 기류가 인류사를 아주 획기적으로 변화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암흑을 향해 가는 세계의 한 편에서 무수한 성자들의 가르침이 싹을 키워가고 있는 것이다.

여러 성자들은 말한다. 모든 문제의 주범은 결국 이 마음의 ‘개인적 욕망’이라고, 따라서 각자의 마음 안에서 작은 혁명들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결국 이 현상계 전체의 변혁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이다. 모든 문제의 해법을 밖에서만 찾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는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고선 다른 해법이 없음을, 그리고 그러한 변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전해 준다. 이 사회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는 이 ‘개인적 욕망’을 묵과한 채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개혁을 논한다는 말인가?

‘권력’이라는 것이 올바로 사용될 때, 그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류의 오래된 꿈은 참혹한 인권 유린 아니면 전쟁이라는 항상 비참한 결말로 끝을 맺어 왔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권력을 얻기 전까지는 항상 정론(正論)만을 펼치던 정치가들도 권력을 얻고 나면 달라진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에만 골몰하게 된다. 이것은 바로 ‘권력욕’ 즉 ‘개인적 욕망’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기보다는 자신만을 사랑하라고 속삭이며, 남을 나처럼 사랑하라고 외치는 ‘참 자아’의 목소리를 말끔히 지워버린다.

노력 없는 부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는 인류가 먹고 쓸 충분한 재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소수를 위해서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을 부추기는 것이 바로 인간들의 한계를 모르는 ‘개인적 소유욕’이라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위의 헐벗은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도울 때 그 자신 또한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도움을 동시에 받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게 망각하며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주 개인적이고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개인적 욕망’ 때문에 말이다.

현실이 그렇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역사를 유지해온 것도 실은 이 인류의 ‘욕망’ 때문이었다. 욕망이 없이 어떻게 지금과 같은 문명을 만들고 유지해 올 수 있었을 것인가?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 승리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인간의 그칠 줄 모르는 ‘욕망에 대한 경외’ 때문이었다.

‘욕망’은 살아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결코 ‘이데올로기’ 따위에게 지지 않는다. 그것은 왜인가? 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바로 욕망이 이데올로기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 또한 욕망의 도구가 되어버린 ‘이념’이니, 인류는 그때그때 필요한 이데올로기들을 만들어내어, 그들의 욕망을 치장하였으며 더욱 빠르게 그것들을 충족시켜 왔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러한 실상이 공개되는 것을 외면해 왔을 뿐이다. 

이러한 ‘욕망’이 만들어낸 모든 오래 묵은 습관, 못된 습관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모색해야 할 길이 아닐까? 그것만이 이 인류가 지금까지의 모든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가장 간명한 비결이 아닐까? 그것은 인류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외면해 왔던 문제의 핵심일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실상을 직시할 때다. 아무리 가슴이 아프고 피 눈물이 흐르더라도 이제는 묵은 때를 도려내야 한다!

우리가 모든 문제의 주범인 지극히 ‘개인적 욕망’을 정화하기 위해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자신의 마음이 각종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그 순간순간의 욕망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느냐, 아니면 그 욕망들의 장난질을 깨어있는 정신으로 지켜보느냐이다. 모든 성자들은 말한다. 무엇보다 “항상 깨어있어라!”, “항상 알아차려라!” 그리고 “이미 지나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헤매지 말고, 항상 현존하는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이다. 

혹자는 한 개인의 ‘욕망의 정화’가 전체 현상계에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하고 의문을 표시할지 모르나, 그것 또한 고정관념일 뿐이다. 사회를 억지로 바꿀 수 있을까? 그 또한 결국 각종 이데올로기와 제도의 개혁으로 포장된 소수의 욕망일 뿐이지 않은가? 설사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이 바뀐다고 하여도 지금과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 단지 인간의 욕망이 다른 방식을 빌어서 나타날 뿐이다. ‘욕망’ 자체를 정화시켜야 한다. 최소한 우리는 이러한 욕망의 장난질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 현상계를 현대 학문에서 ‘복잡계’라고 말한다. 복잡계란 항상 요동하며 어떤 하나의 논리에 규정되지 않는 개방된 세계를 말한다. 복잡계가 요동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욕망이 없는 현상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망은 쉬지 않고 새로운 대상을 갈구한다. 또한 그 요구에 맞춰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ㆍ제품ㆍ이데올로기ㆍ종교 등이 현상계에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계는 욕망을 지배하는 법칙인 ‘카르마의 법칙’ 즉 ‘인과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카르마의 법칙의 전 과정을 완전히 파악하기에는 의식에 한계가 있다.

우리는 현상계의 제 현상들 간의 관계를 단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할 수 없다. 이 우주에는 너무도 많은 원인이 있고 너무도 많은 결과가 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인간의 ‘주관적인 해석’으로 파악할 뿐이다. 이러한 요인 때문에 아무리 완벽한 설계도를 그리고 계획을 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현실화되는 일이 극히 드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이러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현상계는,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도 미미해 보이는 아주 작은 몸짓에 의해서도 일파만파(一波萬波)가 되어 언제든지 전체가 하루아침에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단 그것이 주변으로 공명(共鳴)하여 퍼질 수 있는 에너지가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이 끊임없이 요동하는 현상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계에서 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상황은 계속해서 변해 갈 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간순간의 변화가 갖는 변화의 낌새를 ‘통찰’하는 것이다. 양명(陽明)선생은 ‘앞날의 예측’에 대해 물어오는 제자에게, “그러한 의도 자체가 욕망의 소산일 뿐이다!”라고 질책한 뒤, “순간순간의 낌새를 알아차려라!”고 하였다. 그는 이 현상계가 요동하는 복잡계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욕망’을 정화하여 순수한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 갈 때, 그 순수한 ‘영혼의 빛’은 주위에 퍼질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빛은 또 다른 빛의 존재를 일깨울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 지구 전체가 온통 빛으로 물들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은 우리가 예상하는 것 보다 훨씬 빨리 이 현상계에서 이루어 질 수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우리는 인류정화의 최대 적인 우리 자신의 ‘개인적 욕망’을 정화해야 한다. 개인적 욕망들을 ‘대아적 원願’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조그만 혁명들을 철저히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해의 깊이에 따라, 체험의 깊이에 따라 그만큼의 빛을 자신의 주위에 내뿜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 될 것이 아니다. 이러한 빛은 지구 전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태양의 빛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사심私心’이 있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태양의 빛은 사심이 없다. 그것은 그냥 뿜어져 나올 뿐이다. 태양처럼 사심 없는 빛을 뿜어 낼 수 있는, 빛의 존재’들이 많아진 사회에서 더 이상 옛 제도와 옛 관습ㆍ옛 이데올로기는 통하지 못할 것이다. 이미 사회 전체가 질적으로 달라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자발적 변화가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전체가 변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 사람’이 변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지 말자. 나부터 변화하자!   

2011년 11월 20일 일요일

[윤홍식의 주역 강의] 2.설괘전(說卦傳) 2절


윤홍식의 주역강의#2 - 설괘전[說卦傳] 2절 from 曉檀 on Vimeo.


주역강의 2강입니다.

당초 1강만 과정진행 안내차원에서 소개드린다고 했었는데
2강을 진행하고 나니 학당분들이 주역이 어떤 것인가 하는 이정도의 느낌은 모두 가지고 계셨으면 싶어 추가로 올렸습니다.^^

처음 접하시는 분들에게는 생소하기도 하고, 다른 강의와의 차별성도 느끼기 힘드실 수 있으시겠지만 학당의 강의가 항상 그래왔듯이 주역마저도 그대로 하나로 꿰어지는 것을 보고 있으면 짜릿함 마저도 느껴집니다. 오히려 다른 곳에서 주역 강의를 들어보셨던 분께서는 저와 같은 느낌으로 공감을 하시더군요.

뒷부분에서는 주역을 넘어서는 철학적 배경으로서의 천부경 철학에 대한 소개 및 향후 진행계획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를 해주시고요.

주역이 최소한 이정도는 되어야 공자님이 그토록 열심히 공부하셨다고 할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강 동영상은 다음에 있습니다.

[출처] 주역강의 2강 (홍익학당) |작성자 효단

2011년 11월 8일 화요일

[윤홍식의 주역 강의] 1. 설괘전

조선 문화센터에서의 주역강의를 10주에 걸쳐 마치고
학당에서 주역강의를 시작했습니다.

대략 1년에서 2년 정도로, 시한을 정하지 않고
가능한 상세하게 살펴보자고 시작을 했는데

워낙에 방대한 내용이라서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많은 기대가 됩니다.

설괘전은 주역의 첫 입문으로서 중요한데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2011년 11월 4일 금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1. 담박함을 즐겨라


11. 담박함을 즐겨라


명아주를 먹고 비름나물로 창자를 채우는 자는
얼음처럼 맑고 옥처럼 정결함을 귀중히 여기나,

비단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자는
종처럼 굽실거리고 노비처럼 비굴한 얼굴을 하는 것을 달게 여긴다.

대개 담박한 삶을 살면 뜻이 광명해지며,
기름지고 단 것을 좇으면 절개를 잃게 된다.

藜口莧腸者 多氷淸玉潔
袞衣玉食者 甘婢膝奴顔
蓋志以澹泊明 而節從肥甘喪也(전집-11장)
 
 
명아주나 비름나물은 산이나 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물들입니다.

이러한 나물을 즐겨 먹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며,
양심에 위배되는 욕망을 절제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양심에 위배되는 한이 있더라도
기름진 음식과 화려한 옷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양심보다 자신의 욕망을 중시하는 사람들입니다.

욕망은 양심을 고려하지 않으니
양심이 심하게 가려져 있어서,
남에게 피해를 주더라도
자신의 욕망이 성취되기만 한다면 꺼리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보다 더 부귀를 누리는 자들에게 늘 비굴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갖고자 하는 물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자 늘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으며
자세나 몸짓 하나까지도 비굴함이 가득합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가진 자들에게
어찌 당당할 수 있겠으며,
어찌 양심과 정의를 주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논어]에서 공자님께서
“거친 밥에 물마시고 팔베개를 하고 누웠어도
그 속에 ‘즐거움’이 있도다.
정의롭지 않은 부귀는 나에게 뜬 구름과 같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부귀,
즉 양심을 위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서 얻는 부귀는
군자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군자는 남다른 고통을 즐기는 변태가 아닙니다.
화려한 옷이 좋은 것을 몰라서 입지 않는 것도 아니고,
기름진 음식의 맛을 몰라서 먹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단지 ‘정의’를 위배하면서까지
그것들을 추구하지 않을 뿐입니다.
  
[맹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물고기 요리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며, 곰발바닥 요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런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먹을 수 없다면,
나는 물고기 요리를 버리고 곰발바닥 요리를 취할 것이다.

생명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이고, 정의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면,
나는 생명을 버리고 정의를 취할 것이다.”

군자라고 음식의 맛을 모르며,
명품이 좋은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정의’를 실천하는 것을 더욱 즐길 뿐입니다.
‘불의’를 미워하기를 죽기보다 미워할 뿐입니다.

그러니 정의로운 삶을 통해 얻어지는
명아주와 비름나물을 참으로 즐길 줄 아는 자는,
당연히 맑고 정결함을 귀하게 여기는 자입니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옥처럼 정결한 ‘양심’ 그대로의 삶을 
진심으로 즐기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나물반찬에서도 희열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순수한 양심을 즐기는 군자가 아니라면,
어찌 이러한 담박한 삶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에고는 담박한 맛을 참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늘 자극적인 맛을 찾아 천지를 헤맵니다.

그러나 군자는 그렇지 않으니,
담박하여 맛이 없는 맛을 즐깁니다.    
에고는 불만족하나 참나는 만족합니다.

에고는 자극적인 맛에서 희열을 느끼나,
참나는 양심적인 삶에서 희열을 느낍니다.
그러니 담박한 삶은 인심을 굶주리게 하나
양심을 더욱 드러나게 해줍니다.

만약 반대로 정의롭지 못한 부귀라 하더라도
이를 가리지 않고 탐하는 인심이 우리를 지배한다면,
그는 필시 양심을 지키는 곧은 절개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만고에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직 양심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을
화려한 옷과 기름진 음식보다 더 즐기는 군자라야,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에게 당당할 수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부귀는 군자가
갖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비굴해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2011년 10월 25일 화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0. 순경과 역경의 올바른 대처법

10. 순경과 역경의 올바른 대처법  


은혜로움 속에서 재앙이 생겨나니
뜻대로 잘 될 때 반드시 빨리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실패했을 때 혹 도리어 공을 이루기도 하니
뜻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손을 놓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恩裡由來生害 故快意時 須早回頭
敗時或反成功 故拂心處 莫便放手(전집-10장)

또한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이 되기 마련이니,

이러한 은혜입음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온갖 험담을 퍼부으며
시기하고 질투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호사다마好事多魔)
라는 것이 말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깨어서 알아차리고
미리 대비하지 못한다면,
은혜가 곧장 재앙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한껏 들뜨게 했던 행복의 감로수는
온갖 재앙을 불러들이는 저주의 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군자는 이러한 상황을 당하면,
‘행복’이라는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봅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행복에 매몰되어
참마음을 놓치고 밖으로 치달리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과신하여 거만해지지는 않았는지,
 

하나하나 스스로를 점검해보며
조금이라도 참마음을 가리는 불순물이 발견되거든,
곧장 그러한 때를 벗겨내어
청정한 참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내면의 순수한 양심이 늘 광명하여,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지혜와 사랑과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이 주변상황을 경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게 되어 
우리의 에고가 크게 불행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는 경우에도,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패가 거의 확실시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일이 반전되어 성공으로 인도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있는 군자는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실패로 보일 때조차도,
‘실패’라는 상황에 매몰되어 참마음을 놓치지 않고 늘 여유롭습니다.

그래서 늘 넓고 큰 시야를 유지하여,
어떠한 역경에서도 회생의 발판을 마련하고
좌절의 순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성공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니 참으로 에고가 낙담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깨어있는 마음, 여유로운 마음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묘수를 찾아내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순경이 오건
역경이 오건,

늘 깨어있으십시오!
늘 마음을 챙기십시오!
늘 눈을 크게 뜨고 상황 전체를 통찰하십시오!
자신의 행복에 도취되어
남들이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아 행복해지게 되면,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게 되고
스스로 과신하여 오만해지기 쉽습니다.
늘 제 3자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순경을 만나면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이며
역경을 만난다 하더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깨어있는 군자라면,

왕중양(王重陽)조사 심전(心傳)

청허자(淸虛子) 록(錄)    2003. 10. 17 윤홍식 역(譯)
 
1.서(序)
이글은 금단(金丹)의 지고한 보배이니, 그 사람됨이 아니거든 전하지 말라. 만약 상근기의 큰그릇, 큰 덕의 인재가 이글을 읽는 다면 선(仙)을 닦는 바른 길이 될 것이다.
천심(天心: 단전)을 주(主)로 삼고, 원신(元神)을 용(用)으로 삼으며, 삼보(三寶: 정기신)로서 기틀을 삼는다. 바깥 삼보(三寶: 후천 정기신)가 세지 않으면, 안의 삼보(三寶: 선천 정기신)는 스스로 합하여진다. 처음에 천인(天人)이 감통하면 선천(先天)의 기운이 자연이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한 몸의 안과 밖과 사방, 위아래가 모두 후천(後天)의 음양(陰陽)에 속해있다. 오로지 선천의 한 점 지극한 양(陽)의 기운이 아득하고 헤아릴 수 없는 저 안에 혼융되어 있어, 지극히 허령(虛靈: 텅 비고 신령함)하니 구하여 보기가 어렵다. 비록 바깥에서 왔다하나 실은 안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다.(金丹)
 만약 후천(後天)이 없다면 선천(先天)을 무슨 수로 불러내겠는가? 만약 후천(後天)이 선천(先天)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변화하고 통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무(無) 속에서 유(有)가 생긴 것이며, 유(有) 속에서 무(無)가 생긴 것이다.
무(無)는 유(有)로 인하여 흘러서 상(象)을 이루고, 유(有)는 무(無)로 인하여 감응하여 신령과 통한다. 선천(先天), 후천(後天)의 두 기운은 계곡이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다. 신선(神仙)의 묘용(妙用)은 단지 선천(先天)의 진양(眞陽)의 기운을 채취하여 금단(金丹)의 어미로 삼고, 자신의 양기(陽氣)를 점화하여 순양(純陽)의 체(體)로 변화시키는데 있다.
자신의 원신(本性)을 연마함이(煉己) 익어감에 따라, 선천(先天)이 조화(造化)를 일으키고, 현주(玄珠: 사리)가 모양(象)을 이루게 되고, 태을(太乙: 원신)이 참 것(眞)을 머금게 되고, 육신과 정신이 모두 신묘(妙)해지고 도(道)와 더불어 참 것(眞)으로 합하여 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연(自然)히 그러한 것이지, 한 터럭이라도 인위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2. 옥액(玉液: 정기의 응결, 소약)
정신이 기운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기운이 정신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 호흡(呼吸)이 왕래함에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며, 체(體: 단전)에 집착하지도 말고 용(用: 원신)을 운용하려고도 말라.
뜻을 버리고 허무(虛無)하게 하여 적연(寂然)하게 항상 비추되, 몸과 마음을 무위(無爲)하게 하면 신기(神氣)가 자연히 작위(作爲)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함이 없어도 만물이 자연히 길러지고 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부가 이미 오래되고 고요함에서 안정되면 정신이 기운의 속으로 들어가서 기운과 정신이 합하여 지며, 오행(五行)과 사상(四象)이 자연히 모여서 정기(精氣)가 응결된다. 이것은 감리(坎離: 수화水火)가 사귄 것이니 처음 고요히 할 때의 공부이다.<소주천의 경상> 순음(純陰)의 아래를 양화(陽火)로써 단련해야 하니, 그러면 진기(眞氣)가 발생하게 되며 신명(神明)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3. 산약(産藥; 대약을 생산함)
정신이 곤궁(坤宮: 하단전)을 지키면 진화(眞火)가 저절로 나타난다. 곤궁(坤宮)은 곧 약을 생산하는 원천이며, 음양(陰陽)이 사귀는 장소이다. 만약 진화(眞火)로 단련하지 못하면 금(金)과 수(水)만이 섞일 것이며, 만약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고 뜻을 하나로 하지 못한다면 양화(陽火)가 흩어질 것이니, 대약(大藥)이 어찌 생산되겠으며, 선천(先天)의 기운을 무엇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단련이 오래하여 수(水)가 화(火)를 만나게 되면, 자연히 변화되어 하나의 기운이 될 것이다. 훈증(熏蒸)된 기운이 독맥을 타고 운반되어 돌아감이 그침이 없다. 진정(眞精)이 이로부터 생겨나며, 원기(元氣)가 여기서 배태(胚胎)된다.
호흡(呼吸)이 서로 합하여 지고, 맥(脈)이 편안해지고 기운이 멈추며, 고요하여 안정된다. 크게 안정된 가운데에서 선천(先天)의 한 기운이 허무(虛無)한 중에 나타난다. 이리하여 선천(先天)의 엄마 기운으로 후천(後天)의 자식 기운을 굴복시킨다. 이렇게 그 자연(自然)을 따라 하며, 급하게 욕심내지 않으면 선천(先天)이 자연히 발생한다.
혼돈(混沌)의 처음에 천지(天地)가 나뉘지 않고 현황(玄黃: 천지의 색깔)이 섞여 있다가, 때가 이름에 기운이 변화하여 고요한 중에 움직임이 생겨나게 된다. 이 움직이는 자리에서 바야흐로 조화(造化)를 알 수 있다.
만약 한 물건이 있어서, 혹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면 이것이 바로 <대약(大藥)>이니 싹트는 것과 같다. 급히 캘 필요가 없으니 만약 한 터럭이라도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면, 천진(天眞: 대약, 선천의 한 기운)을 잃게 될 것이다.

4. 채약(採藥; 대약을 캠) 
정신이 건궁(乾宮: 상단전) 지키면 진기(眞氣)가 자연히 돌이켜 진다. 건궁(乾宮)은 조화(造化)의 근원이며, 이 살아있는 몸이 기운을 받아들이는 처음이다. 이것을 알아서 수련하는 이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처음에는 곤궁(坤宮: 하단전)에 정신을 응결시켜서 음정(陰精)을 단련하여 양기(陽氣)로 변화되게 하여 훈증된 기운을 상승시켜 독맥으로 운반하여 돌아감에 쉬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건궁(乾宮: 상단전)에 정신을 응결시켜서 조금씩 단련시키고 응결시켜 한 알의 <현주(玄珠: 사리, 金丹)>를 결성하게 된다. 크기는 기장쌀 알만 하며 면전(面前)에 있게 되니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게 된다. 선천(先天)의 허무(虛無)의 진기(眞氣)가 자연히 회복된다.
한 점의 영광(靈光)이 원만하고 빛이 나서 위아래를 두루 비추고, 안으로 참되고 밖으로 감응해서 선천(先天)의 기운이 자연히 허무(虛無)한 중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엄마 기운으로 자식 기운을 굴복시켜서 자연히 조화(造化)의 묘(妙)함과 감응하여 합하여진 것이다.
처음에 단(丹)을 수련할 시에 수중(水中)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종내 완고하고 헛되이 되어 필경 이루어지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 일월(日月)이 서로 교감하는 즈음에 선천(先天)이 알맞게 이르는 시기에 상단전에서는 바람이 불어 바다의 파도를 맑게 하며, 이 몸은 만장(萬丈)의 바다 속에 있는 것 같게 되어, 수(水)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화(火)가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며, 천지(天地)와 남과 나가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니, 혼몽하여 취하여 꿈을 꾸는 듯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용호(龍虎)가 서로 사귀는 때이다. 금목(金木)이 서로 탐하고, 수화(水火)가 서로 흐르게 되며, 경상이 나타나기를 신속하기가 벼락과 같이 하니, 매우 잽싸게 채취하여야 한다.
그 약을 채취하는 묘(妙)는 천 개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는 것과 같으니, 오로지 일촌(一寸)의 기틀을 활용하여야 한다. 채취한 듯, 않한 듯 하거나, 채취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은 채취한,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약의 채취이다. 

5. 득약(得藥: 대약을 얻음)
정신이 현궁(玄宮: 상단전)을 지키고 생각으로 빈부(牝府: 하단전)를 맞이하면, 정신과 생각이 서로 합하여 져서 선천(先天)의 기운이 스스로 얻어진다. 황홀하고 아득하며, 한 점의 붉은 빛(紅光)이 하원(下元)으로 들어오면 자신의 진기(眞氣)가 들이마시듯 서로 버무려 진다. 음(陰)은 양(陽)을 껴안고, 양(陽)은 음(陰)으로 흘러서 지정(至精: 지극한 정)은 발현되어 바다는 넘치고 물결은 용솟음친다.
하단전에서부터 상단전으로 올라가서 금액(金液)으로 화하여서 삼켜져서 내복(內服)되면 향기가 달고 맑으며 신선하다. (이를 服食이라 한다) 모든 구멍에 봄이 오고, 온몸에서 빛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건곤(乾坤)의 사귐이니,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묘결이다.
오로지 그 위험됨을 방지하고, 잘 막아서 봉고(封固)하여 조금도 세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온양(溫養)함이다.

6. 온양(溫養: 따뜻하게 잘 기름)
정신이 황방(黃房: 도태가 맺어지는 자리, 黃庭)을 잘 지키면 금태(金胎: 황금빛 도태)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황방(黃房)은 건궁(乾宮)의 아래에 있고, 곤궁(坤宮)의 위에 있다.
24시간 중에 생각 생각마다 규중(規中: 黃庭)에 이르게 하여 빛을 머금고 갈무리하며,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숨을 고요히 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닭이 계란을 감싸듯 하며, 용이 여의주를 기르듯 하여, 그 근원을 감싸서 하나로 지키면 선천(先天), 원신(元神)의 기운이 서로 시시각각으로 합하여 져서, 점점 서로를 변화시킬 것이다.
단지 정신을 그치고 쉬게 하면 화후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화후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100일이면 그 공력이 신령스러워 질 것이며, 10달이면 태(胎)가 원만해질 것이다. 음백(陰魄)은 저절로 변화될 것이며, 양신(陽神)은 출현할 것이다.
1000일(대략 3년)이 지난 후에는 온양(溫養)의 화후가 족하여서 일체의 음(陰)이 다 벗겨져서, 몸이 순양체로 변하여 영아의 형상이 나타나고 몸 바깥에 몸이 있게 될 것이니, 형체는 연기와 구름과 같고, 정신은 태허(太虛)와 한 가지가 될 것이다.
숨은 즉 형체가 정신으로 돌아가며, 드러난 즉 정신은 기운과 하나가 된다. 일월(日月) 아래를 거닐어도 그림자가 없고, 금석(金石)을 뚫고 지나가도 막힘이 없다. 온양(溫養)을 3년간 한 후에야 영아가 노성(老成)하게 되니, 멀리 가서는 안된다. 그대로 9년을 더해야 태허(太虛)와 더불어 한 몸이 되어, 형체와 정신이 모두 신묘해지고 도(道)와 함께 참 것(眞)으로 합하여지게 된다.
천지(天地) 산천(山川)은 붕괴할 때가 있으나, 나의 도체(道體)는 영겁을 장존(長存)할 수 있다. 인간세계(人間世界)에 숨어 살며, 공적을 쌓고 덕행을 이루어서, 천지(天地)를 이끌고 음양(陰陽)을 붙잡아서, 음양(陰陽)이 사물을 만들 수 없게 하여야 한다.(음양을 초월한 무극無極ㆍ혼원일기混元一氣의 경지에 이름) 천선(天仙)의 도(道)는 여기서 마쳐진다. (佛家의 부처님의 경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