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9일 일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7. 나를 낮추는 것이 나를 높이는 것이다

세상살이에서는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이 고귀한 것이니,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한 걸음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대인관계에서는
조금 관대한 것이 복이 되니,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을 이롭게 하는 토대가 된다.

處世 讓一步爲高 退步 卽進步的張本
待人 寬一分是福 利人 實利己的根基(전집-17장)


군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언제나 양보만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와 상대방의 욕망이 충돌하고,
나보다는 상대방이 그것을 얻는 것이 더 효율적일 때,

보다 성숙한 어른인 군자가
양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강렬하게 추구하는
욕구의 종류나 그 강도가 다릅니다.

그래서 소인들이 돈이나 권력에 대해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면,
군자는 양심의 완전한 실현에 대해
강렬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군자의 양보는
군자와 소인 모두에게 이익이 됩니다.

군자는 남에게 양보함으로써
‘양심’의 욕구를 채워서 이익이며,
소인은 자신의 세속적 욕구를
채울 수가 있어서 이익입니다.

군자는 ‘에고의 충족’보다는
‘양심의 충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니,

양심을 밝히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남을 위해서 에고의 뜻을
접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군자가 양심을 밝히고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의 뜻을 양보하고
남의 뜻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면,
우리의 양심은 훤히 밝아질 것입니다.

또한 나보다 남을 위해 양보한 것이니,
인과응보의 자연법칙에 의하여,
베푼 덕이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어찌 군자가 마다하겠습니까?

적극적으로 찾아서는 못할망정,
덕을 베풀 소중한 기회가 찾아오는 것을
어찌 싫어할 수 있겠습니까? 
 남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늘 관대하고자 노력해야합니다.

공자님께서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자한 자는 자신이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주고,
자신이 도달하고 싶으면 남을 도달하게 해준다.”
(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인자仁者’를 목표로 하는 군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대상을 ‘원하는 마음’을 잘 살펴보면,
남이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원하고 있는지
잘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군자는 측은지심의 양심을 세상에 밝히고자,
남의 마음을 잘 알아차리고 헤아려
관대하게 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가 남의 마음을 헤아려
자신의 것을 양보하여 남을 이롭게 할 때,
나의 양심은 광명해질 것이며,
선업은 복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
자신을 이롭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군자의 길입니다.
군자들이 세상을 살아가고,
남와 인연을 맺는 심법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양보나 관대함의 정도는
자신의 양심의 계발정도에 준하여,

즉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의 계발정도를 넘어선 양보는,
자신의 양심을 밝히고 남을 이롭게 하는데,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남에게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은,
자신을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군자의 길’을 걷는 이라면,
에고가 추구하는 나에게만 유리한 ‘소아적 효율성’보다는,
양심이 추구하는 모두에게 유리한 ‘대아적 효율성’을
더욱 중시하니까요.

http://cafe.naver.com/bohd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윤홍식의 단학 강의1


홍익학당 단학경전 강의 - 심인경 from 홍익학당 on Vimeo.

새해들어 학당에서 단학경전 강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요 근래 견성콘서트, 고전콘서트, 주역강의 등으로 너무 밖에서만 강의를 진행한 듯 싶어
이번에는 흥여회원들 위주로 학당에서 조용히 진행하고 있네요.
근래 깨어있음의 강조와 함께 함께 대학/중용/주역/도마복음/노자 등의 강의를 진행하다가
오랫만에 단학경전을 다시 살펴볼 기회를 가지니 오랫만에 고향에 돌아온 듯한 편한 느낌입니다~.

다루게 될 단학경전은 조선중기의 도인 남궁두가 받았다는 12개의 경전을 모두 다룰 예정인데
대략 2~3개월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추후 DVD로 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중 첫번째 강의된 고상옥황심인경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였습니다.

한번 내용을 들어보시면 요 근래 학당에서 진행하였던 도마복음 강의나 주역강의와도
어떻게 이렇게 상통하나 싶은 느낌이 드실 듯 싶네요. 정말 재미있게 들었답니다.
도마복음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단학이 너무 신선하네요.

단학은 학당에서 강조하는 '존심-양기-궁리-역행-애인'의 덕목 중 하나인 '양기'의 항목이지만
모든 항목을 고르게 배양한다는 커다란 수행의 관점에서 바라봐 주십시오
장소 사정상 관심있으신 많은분을 모시고 진행하지 못하는 점은 양해하여 주십시오~

2012년 1월 14일 토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6. 군자는 정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총애를 받고 이익을 얻는 것은 
남보다 앞서지 말며,

덕을 밝히고 공업을 세움에 있어서는
남보다 뒤쳐져서는 안 된다.

보수를 받을 때는
분수 밖을 벗어나서는 안 되며,

행실을 닦을 때는
분수 안으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

寵利 毋居人前 德業 毋落人後
受享 毋踰分外 修爲 毋減分中(전집-16장)


우리의 ‘에고’는
늘 ‘나’를 먼저 챙깁니다.

그러다보니,
남보다 더 총애를 받고 싶고
남보다 더 물질적 이익을 얻고 싶은 것은,
우리 에고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너무 추구하다 보면,
자신의 본래 모습인 ‘양심’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일을 당해서는,
섣불리 욕망에 취해
남을 앞서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잘 챙겨서,
혹시 에고의 욕망에 심취하여,
양심의 순수함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를
세밀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애초에 그런 일을 당해서는,
남보다 앞서려는 마음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채근담]은 양심을 밝히는 것을
최고의 보람이자 맛으로 여기는,
‘군자의 길’을 논하는 책이라는 것을요.

그러니 자신이 과연 군자의 길을 추구하는지 잘 돌아보시고,
그러한 길을 진심으로 추구하신다면,
이러한 절실한 가르침을 반드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논어]에서 “군자는 ‘정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군자는 비록 ‘에고의 충족’에 있어서는
늘 남보다 뒤쳐지기를 바라지만,
‘양심의 충족’에 있어서는
절대로 남보다 뒤쳐지지 않아야 합니다.

양심에 뿌리를 둔
사랑(仁)과 정의(義), 절도(禮)와 지혜(智)를,
마음과 언행으로 실천하는 것을
‘덕德’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늘 이 덕이 밝게 드러나게 해야 하며,
이러한 덕을 바탕으로
나와 남을 모두 살리는 큰 사업을 일으켜야 합니다.

덕을 밝히고 공업을 세움은,
모두 우리 내면의 ‘양심’을
세상에 밝게 밝히는 것일 뿐입니다.

‘양심’을 따르는 길을 걷는 군자는
자신이 일한 보수를 받을 때,
늘 자신이 실제 일한 한도 내에서 받기를 원합니다.

절대로 남보다 많은 보수를 바라거나,
자신의 분수를 넘어서는
보수를 바라지 않습니다.

자신의 몫 이상을 바라는 자를
어찌 정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인간적인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군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이라면,
이러한 마음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자신이 일한 보수 이상을
바라고 또 받게 되면,
그의 에고는 ‘이익’을 향해 치달리기 시작하며,
그의 ‘양심’은 서서히 가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언행’을 닦음에 있어서는,
절대로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한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지금 처지가 사랑과 정의, 절도와 지혜를
실천하기에 부족함이 많더라도,
절대로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여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늘 자신의 부족한 점을 살피고 보완하며,
성인들의 덕행을 실천할 수 있도록
끝없이 정진합니다.
이것이 군자의 길입니다.

2012년 1월 5일 목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5. 참사람이 되는 요결

벗을 사귈 때는
늘 30%의 의협심을 지녀야 하며,

인격을 만들 때는
늘 한 점 참마음을 보존해야 한다.

交友 須帶三分俠氣
作人 要存一點素心(전집-15장)


‘의협심’이라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남을 돕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는 정의로운 마음입니다.
  한자로 ‘협俠’이라는 글자를 풀어보면,
‘양심’이 늘 깨어있는 사람은,
남을 나처럼 여겨 동정하며(측은지심),
불의를 보면 부끄러워하고 미워하기에(수오지심),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무시하지 못합니다.
사람됨(人)이 남들(人人)을 양 옆에 품어 주는
큰 사람(大)이라는 뜻입니다.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협객俠客’이란
바로 이러한 큰 사람들입니다.
단순히 무공만 높은 사람들이 아니죠.

마음에 양심이 살아 있어서,
남의 어려운 사정을 모른 척 하지 못하고,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고 남을 돕는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모름지기 벗을 사귈 때는
반드시 이러한 ‘의협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벗은 나의 스승이자 형제이니,
다른 누구보다도 그 어려운 사정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벗을 대할 때는
늘 이 의협심을 30% 정도는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정에만 너무 골몰하여,
벗을 어려운 처지를 무시해서는
자신의 양심이 차차 어두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됨을 닦아가는 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이자 참마음인 ‘양심’을
그대로 복원하는 데 있습니다.

하늘과 같이 위대한 성인도
다른 것을 닦아서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양심’을 잘 보존하고 확충했을 뿐입니다.

양심은 우리 내면에서 그 힘이 미약합니다.
그러니 늘 깨어서 양심을 보살피고 양심을 확충시켜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 오감이  
양심의 뜻과 하나가 되어 작동하도록 닦아가야 합니다.  
[맹자]에서 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부분은 아주 적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이 부분을 버리고,
군자는 이 부분을 잘 보존한다.”
 
그 아주 적은 부분은 바로 우리의 ‘양심’입니다.
우리의 ‘참마음’인 양심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짐승과의 차이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니, 얼마든지 짐승보다 더한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양심을 보존해야 합니다.

아무리 권력에 정점에 선 사람도,
아무리 부귀를 손안에 얻은 사람도,
‘양심’이 없다면 참으로 값어치가 없습니다.
 
힘이 없어 억지로 참고 있는 사람들과
물욕에 눈이 멀어 아부하는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동정심도 의협심도
올바른 판단력도 남에 대한 배려도 없는
그러한 사람과 단 한순간이라도 같이 있고 싶겠습니까?
그러니 자신의 인격을 다듬어
성인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그 유일한 길인 ‘양심의 보존’을
참으로 소중히 챙겨야 하겠습니다.

‘참마음’을 간직하지 못하고서는,
‘참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우리의 ‘중심봉’이자,
가장 중요한 ‘알짬’이 되는 마음입니다.
이 양심을 놓치는 순간,
우리의 인격은 모든 가치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무리 양심’이 미약하더라도,
‘한 점의 불씨’만 남아있다면,
얼마든지 태양처럼 광명한 불로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이는,
언제 어디서나 ‘한 점의 양심’을
잘 보존하고 챙겨야 할 것입니다. 

양심을 위협하는 ‘3가지 악독한 마음’ 즉,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아무리 우리를 위협해오더라도,

반드시 “모른다!”를 통해 그들을 물리치고,
‘양심’이라는 우리의 ‘알짬 마음’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이 ‘참사람’이 되는 최고의 요결입니다. 

2012년 1월 1일 일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4. 참된 학문과 수양의 길

인격을 만듦에,
아주 고원한 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세속적인 감정을 털어버릴 수만 있으면
명사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

학문을 함에,
아주 많은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물욕을 덜어버릴 수만 있으면
성인의 경지로 초월할 수 있다.  

作人 無甚高遠事業 擺脫得俗情 便入名流
爲學 無甚增益工夫 減除得物累 便超聖境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
남들의 존경을 받는 명사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업적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이룰 수 없는 탁월한 사업을 일으켜야만,
진정으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은 쉬우나,
자신의 양심의 인정을 받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은 흔히 우리의 겉만 보고 판단하거나
결과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남들의 이목은 속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은 속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매우 은밀한 속마음까지
한 눈에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흔히 현혹시키기 쉬운
남들의 이목을 붙잡는데 주목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할까요?
속이기 쉬운 남들의 인정일까요?
아니면 속일 수 없는 자신의 인정일까요?

더구나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은
한 없이 무상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남들의 무상하고 허망한 인정을 받고자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한 위대한 왕은 많으나,
자신의 욕망을 정복한 왕은 드뭅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돋보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이 명사가 아니고,
‘남들에게 돋보이고 싶은 마음’ 자체를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명사인 것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에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에고를 충족시키고자 골몰하다보면,
자신의 ‘양심’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겨보고자
공을 다투는 ‘세속적인 감정’에서
멀리 벗어나보십시오.

바로 거기에 참다운 ‘양심의 희열’이 있습니다.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뭔가 남다른 일을 저질러서
남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모른다!”라고 선언하고
그런 마음에 힘을 실어주지 말아보십시오.

그러한 마음에 관심을 주지 마시고,
오직 세속적 감정에 무심한 마음,
‘모르는 마음’을 잘 지켜나가 보십시오.

‘모르는 마음’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세속적 감정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마음’입니다.

이 초심을 잘 지켜가고 키워나갈 때,
우리 마음은 의젓해지고 초연해질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며, 
양심의 소리에 더욱 예민해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걸어야할 길이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바로 이런 존재라야 참다운 ‘군자’이며,
진정한 ‘명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학문을 쌓아야
성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학문이라는 것이,
단순히 글을 많이 보고
많은 것을 숙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논어]에서 공자님은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 같으냐?
아니다. 나는 오직 ‘하나’(양심)로 꿰뚫었을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공자님은 평생 하늘이 인간을 낳을 때,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양심’ 하나를 밝히는데 충실하셨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학문 덕에 위대한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학문입니다.

[채근담]은 말합니다.
단순이 ‘지식’을 쌓는 공부에 매진한다고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성인이 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물욕’을 버리고
‘양심’을 밝게 드러내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식은 ‘양심’을 밝히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때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본질’이고 지식은 ‘말단’입니다.
학문의 본말이 전도되면 결코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공자님께서는 늘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양심이 원하는 것은 하고,
양심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밀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좋아하는 것은
나와 남이 모두 행복해지는 ‘선’이며,
양심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나만 살자고 남을 해치는 ‘악’입니다.

그러나 ‘물욕’에 빠진 마음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사력을 다하기에,
남의 고통이나 불행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심의 뜻을 저버리고
물욕의 뜻을 따릅니다.
 
그러니 ‘물욕’과 ‘양심’은 상극의 관계에 있습니다.
물욕이 줄어들면 양심이 자라나며,
양심이 줄어들면 물욕이 자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