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일 일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4. 참된 학문과 수양의 길

인격을 만듦에,
아주 고원한 사업을 하지 않더라도,
세속적인 감정을 털어버릴 수만 있으면
명사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다.

학문을 함에,
아주 많은 공부를 하지 않더라도,
물욕을 덜어버릴 수만 있으면
성인의 경지로 초월할 수 있다.  

作人 無甚高遠事業 擺脫得俗情 便入名流
爲學 無甚增益工夫 減除得物累 便超聖境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어,
남들의 존경을 받는 명사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소망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뛰어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다른 업적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이룰 수 없는 탁월한 사업을 일으켜야만,
진정으로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남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것은 쉬우나,
자신의 양심의 인정을 받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남들은 흔히 우리의 겉만 보고 판단하거나
결과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남들의 이목은 속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은 속이기 어렵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매우 은밀한 속마음까지
한 눈에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흔히 현혹시키기 쉬운
남들의 이목을 붙잡는데 주목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성공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인정을 받아야 할까요?
속이기 쉬운 남들의 인정일까요?
아니면 속일 수 없는 자신의 인정일까요?

더구나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은
한 없이 무상하기만 합니다.

이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남들의 무상하고 허망한 인정을 받고자
자신의 양심을 속이지 마십시오.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자신의 마음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정복한 위대한 왕은 많으나,
자신의 욕망을 정복한 왕은 드뭅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돋보이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이 명사가 아니고,
‘남들에게 돋보이고 싶은 마음’ 자체를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명사인 것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를 돋보이게 하고 싶은 ‘에고’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에고를 충족시키고자 골몰하다보면,
자신의 ‘양심’을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겨보고자
공을 다투는 ‘세속적인 감정’에서
멀리 벗어나보십시오.

바로 거기에 참다운 ‘양심의 희열’이 있습니다.

방법은 아주 쉽습니다.
뭔가 남다른 일을 저질러서
남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모른다!”라고 선언하고
그런 마음에 힘을 실어주지 말아보십시오.

그러한 마음에 관심을 주지 마시고,
오직 세속적 감정에 무심한 마음,
‘모르는 마음’을 잘 지켜나가 보십시오.

‘모르는 마음’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세속적 감정에 물들지 않은 ‘원초적 마음’입니다.

이 초심을 잘 지켜가고 키워나갈 때,
우리 마음은 의젓해지고 초연해질 것입니다.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며, 
양심의 소리에 더욱 예민해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걸어야할 길이 더욱 또렷해질 것입니다.

바로 이런 존재라야 참다운 ‘군자’이며,
진정한 ‘명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대한 학문을 쌓아야
성인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위대한 학문이라는 것이,
단순히 글을 많이 보고
많은 것을 숙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논어]에서 공자님은
“자공아, 너는 내가 많이 배워서 아는 사람 같으냐?
아니다. 나는 오직 ‘하나’(양심)로 꿰뚫었을 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공자님은 평생 하늘이 인간을 낳을 때,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으신
‘양심’ 하나를 밝히는데 충실하셨을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학문 덕에 위대한 성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이 되는 학문입니다.

[채근담]은 말합니다.
단순이 ‘지식’을 쌓는 공부에 매진한다고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성인이 되고 싶다면,
지금 당장 ‘물욕’을 버리고
‘양심’을 밝게 드러내라!”라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지식’을 쌓는 공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지식은 ‘양심’을 밝히는데 유용하게 활용될 때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본질’이고 지식은 ‘말단’입니다.
학문의 본말이 전도되면 결코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공자님께서는 늘 자신의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양심이 원하는 것은 하고,
양심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밀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좋아하는 것은
나와 남이 모두 행복해지는 ‘선’이며,
양심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나만 살자고 남을 해치는 ‘악’입니다.

그러나 ‘물욕’에 빠진 마음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에만 사력을 다하기에,
남의 고통이나 불행은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양심의 뜻을 저버리고
물욕의 뜻을 따릅니다.
 
그러니 ‘물욕’과 ‘양심’은 상극의 관계에 있습니다.
물욕이 줄어들면 양심이 자라나며,
양심이 줄어들면 물욕이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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