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5일 화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10. 순경과 역경의 올바른 대처법

10. 순경과 역경의 올바른 대처법  


은혜로움 속에서 재앙이 생겨나니
뜻대로 잘 될 때 반드시 빨리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실패했을 때 혹 도리어 공을 이루기도 하니
뜻대로 되지 않는 곳에서 손을 놓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恩裡由來生害 故快意時 須早回頭
敗時或反成功 故拂心處 莫便放手(전집-10장)

또한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이 되기 마련이니,

이러한 은혜입음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온갖 험담을 퍼부으며
시기하고 질투하기 마련입니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호사다마好事多魔)
라는 것이 말 그대로 현실화되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깨어서 알아차리고
미리 대비하지 못한다면,
은혜가 곧장 재앙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한껏 들뜨게 했던 행복의 감로수는
온갖 재앙을 불러들이는 저주의 독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군자는 이러한 상황을 당하면,
‘행복’이라는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반드시 스스로를 반성하고 돌아봅니다.

자신의 마음이 이러한 행복에 매몰되어
참마음을 놓치고 밖으로 치달리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과신하여 거만해지지는 않았는지,
 

하나하나 스스로를 점검해보며
조금이라도 참마음을 가리는 불순물이 발견되거든,
곧장 그러한 때를 벗겨내어
청정한 참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내면의 순수한 양심이 늘 광명하여,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지혜와 사랑과 용기를 잃어버리지 않으며
언제 어디서나 자유로이 주변상황을 경영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게 되어 
우리의 에고가 크게 불행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는 경우에도,
우리는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실패가 거의 확실시되어가는 상황에서도,
일이 반전되어 성공으로 인도되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있는 군자는
자신이 추진하는 일이 실패로 보일 때조차도,
‘실패’라는 상황에 매몰되어 참마음을 놓치지 않고 늘 여유롭습니다.

그래서 늘 넓고 큰 시야를 유지하여,
어떠한 역경에서도 회생의 발판을 마련하고
좌절의 순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성공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니 참으로 에고가 낙담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봉착하더라도,

깨어있는 마음, 여유로운 마음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묘수를 찾아내어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순경이 오건
역경이 오건,

늘 깨어있으십시오!
늘 마음을 챙기십시오!
늘 눈을 크게 뜨고 상황 전체를 통찰하십시오!
자신의 행복에 도취되어
남들이 느끼는 감정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람이 큰 은혜를 받아 행복해지게 되면,
자신에 대해 과대평가를 하게 되고
스스로 과신하여 오만해지기 쉽습니다.
늘 제 3자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순경을 만나면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이며
역경을 만난다 하더라도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깨어있는 군자라면,

왕중양(王重陽)조사 심전(心傳)

청허자(淸虛子) 록(錄)    2003. 10. 17 윤홍식 역(譯)
 
1.서(序)
이글은 금단(金丹)의 지고한 보배이니, 그 사람됨이 아니거든 전하지 말라. 만약 상근기의 큰그릇, 큰 덕의 인재가 이글을 읽는 다면 선(仙)을 닦는 바른 길이 될 것이다.
천심(天心: 단전)을 주(主)로 삼고, 원신(元神)을 용(用)으로 삼으며, 삼보(三寶: 정기신)로서 기틀을 삼는다. 바깥 삼보(三寶: 후천 정기신)가 세지 않으면, 안의 삼보(三寶: 선천 정기신)는 스스로 합하여진다. 처음에 천인(天人)이 감통하면 선천(先天)의 기운이 자연이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사람의 한 몸의 안과 밖과 사방, 위아래가 모두 후천(後天)의 음양(陰陽)에 속해있다. 오로지 선천의 한 점 지극한 양(陽)의 기운이 아득하고 헤아릴 수 없는 저 안에 혼융되어 있어, 지극히 허령(虛靈: 텅 비고 신령함)하니 구하여 보기가 어렵다. 비록 바깥에서 왔다하나 실은 안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것이다.(金丹)
 만약 후천(後天)이 없다면 선천(先天)을 무슨 수로 불러내겠는가? 만약 후천(後天)이 선천(先天)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변화하고 통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바로 무(無) 속에서 유(有)가 생긴 것이며, 유(有) 속에서 무(無)가 생긴 것이다.
무(無)는 유(有)로 인하여 흘러서 상(象)을 이루고, 유(有)는 무(無)로 인하여 감응하여 신령과 통한다. 선천(先天), 후천(後天)의 두 기운은 계곡이 소리에 응하는 것과 같다. 신선(神仙)의 묘용(妙用)은 단지 선천(先天)의 진양(眞陽)의 기운을 채취하여 금단(金丹)의 어미로 삼고, 자신의 양기(陽氣)를 점화하여 순양(純陽)의 체(體)로 변화시키는데 있다.
자신의 원신(本性)을 연마함이(煉己) 익어감에 따라, 선천(先天)이 조화(造化)를 일으키고, 현주(玄珠: 사리)가 모양(象)을 이루게 되고, 태을(太乙: 원신)이 참 것(眞)을 머금게 되고, 육신과 정신이 모두 신묘(妙)해지고 도(道)와 더불어 참 것(眞)으로 합하여 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자연(自然)히 그러한 것이지, 한 터럭이라도 인위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2. 옥액(玉液: 정기의 응결, 소약)
정신이 기운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기운이 정신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 호흡(呼吸)이 왕래함에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며, 체(體: 단전)에 집착하지도 말고 용(用: 원신)을 운용하려고도 말라.
뜻을 버리고 허무(虛無)하게 하여 적연(寂然)하게 항상 비추되, 몸과 마음을 무위(無爲)하게 하면 신기(神氣)가 자연히 작위(作爲)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천지(天地)가 함이 없어도 만물이 자연히 길러지고 변화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부가 이미 오래되고 고요함에서 안정되면 정신이 기운의 속으로 들어가서 기운과 정신이 합하여 지며, 오행(五行)과 사상(四象)이 자연히 모여서 정기(精氣)가 응결된다. 이것은 감리(坎離: 수화水火)가 사귄 것이니 처음 고요히 할 때의 공부이다.<소주천의 경상> 순음(純陰)의 아래를 양화(陽火)로써 단련해야 하니, 그러면 진기(眞氣)가 발생하게 되며 신명(神明)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3. 산약(産藥; 대약을 생산함)
정신이 곤궁(坤宮: 하단전)을 지키면 진화(眞火)가 저절로 나타난다. 곤궁(坤宮)은 곧 약을 생산하는 원천이며, 음양(陰陽)이 사귀는 장소이다. 만약 진화(眞火)로 단련하지 못하면 금(金)과 수(水)만이 섞일 것이며, 만약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하고 뜻을 하나로 하지 못한다면 양화(陽火)가 흩어질 것이니, 대약(大藥)이 어찌 생산되겠으며, 선천(先天)의 기운을 무엇으로 얻을 수 있겠는가? 
단련이 오래하여 수(水)가 화(火)를 만나게 되면, 자연히 변화되어 하나의 기운이 될 것이다. 훈증(熏蒸)된 기운이 독맥을 타고 운반되어 돌아감이 그침이 없다. 진정(眞精)이 이로부터 생겨나며, 원기(元氣)가 여기서 배태(胚胎)된다.
호흡(呼吸)이 서로 합하여 지고, 맥(脈)이 편안해지고 기운이 멈추며, 고요하여 안정된다. 크게 안정된 가운데에서 선천(先天)의 한 기운이 허무(虛無)한 중에 나타난다. 이리하여 선천(先天)의 엄마 기운으로 후천(後天)의 자식 기운을 굴복시킨다. 이렇게 그 자연(自然)을 따라 하며, 급하게 욕심내지 않으면 선천(先天)이 자연히 발생한다.
혼돈(混沌)의 처음에 천지(天地)가 나뉘지 않고 현황(玄黃: 천지의 색깔)이 섞여 있다가, 때가 이름에 기운이 변화하여 고요한 중에 움직임이 생겨나게 된다. 이 움직이는 자리에서 바야흐로 조화(造化)를 알 수 있다.
만약 한 물건이 있어서, 혹 드러나기도 하고 숨기도 하며,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면 이것이 바로 <대약(大藥)>이니 싹트는 것과 같다. 급히 캘 필요가 없으니 만약 한 터럭이라도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면, 천진(天眞: 대약, 선천의 한 기운)을 잃게 될 것이다.

4. 채약(採藥; 대약을 캠) 
정신이 건궁(乾宮: 상단전) 지키면 진기(眞氣)가 자연히 돌이켜 진다. 건궁(乾宮)은 조화(造化)의 근원이며, 이 살아있는 몸이 기운을 받아들이는 처음이다. 이것을 알아서 수련하는 이가 바로 성인(聖人)이다.
처음에는 곤궁(坤宮: 하단전)에 정신을 응결시켜서 음정(陰精)을 단련하여 양기(陽氣)로 변화되게 하여 훈증된 기운을 상승시켜 독맥으로 운반하여 돌아감에 쉬지 않게 하여야 한다.
그 다음에는 건궁(乾宮: 상단전)에 정신을 응결시켜서 조금씩 단련시키고 응결시켜 한 알의 <현주(玄珠: 사리, 金丹)>를 결성하게 된다. 크기는 기장쌀 알만 하며 면전(面前)에 있게 되니 한 번 얻으면 영원히 얻게 된다. 선천(先天)의 허무(虛無)의 진기(眞氣)가 자연히 회복된다.
한 점의 영광(靈光)이 원만하고 빛이 나서 위아래를 두루 비추고, 안으로 참되고 밖으로 감응해서 선천(先天)의 기운이 자연히 허무(虛無)한 중에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엄마 기운으로 자식 기운을 굴복시켜서 자연히 조화(造化)의 묘(妙)함과 감응하여 합하여진 것이다.
처음에 단(丹)을 수련할 시에 수중(水中)에서 그것을 찾는다면, 종내 완고하고 헛되이 되어 필경 이루어지는 바가 없을 것이다. 
그 일월(日月)이 서로 교감하는 즈음에 선천(先天)이 알맞게 이르는 시기에 상단전에서는 바람이 불어 바다의 파도를 맑게 하며, 이 몸은 만장(萬丈)의 바다 속에 있는 것 같게 되어, 수(水)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화(火)가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며, 천지(天地)와 남과 나가 있음을 알지 못하게 되니, 혼몽하여 취하여 꿈을 꾸는 듯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용호(龍虎)가 서로 사귀는 때이다. 금목(金木)이 서로 탐하고, 수화(水火)가 서로 흐르게 되며, 경상이 나타나기를 신속하기가 벼락과 같이 하니, 매우 잽싸게 채취하여야 한다.
그 약을 채취하는 묘(妙)는 천 개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되는 것과 같으니, 오로지 일촌(一寸)의 기틀을 활용하여야 한다. 채취한 듯, 않한 듯 하거나, 채취하지 않은 것 같아도 실은 채취한,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약의 채취이다. 

5. 득약(得藥: 대약을 얻음)
정신이 현궁(玄宮: 상단전)을 지키고 생각으로 빈부(牝府: 하단전)를 맞이하면, 정신과 생각이 서로 합하여 져서 선천(先天)의 기운이 스스로 얻어진다. 황홀하고 아득하며, 한 점의 붉은 빛(紅光)이 하원(下元)으로 들어오면 자신의 진기(眞氣)가 들이마시듯 서로 버무려 진다. 음(陰)은 양(陽)을 껴안고, 양(陽)은 음(陰)으로 흘러서 지정(至精: 지극한 정)은 발현되어 바다는 넘치고 물결은 용솟음친다.
하단전에서부터 상단전으로 올라가서 금액(金液)으로 화하여서 삼켜져서 내복(內服)되면 향기가 달고 맑으며 신선하다. (이를 服食이라 한다) 모든 구멍에 봄이 오고, 온몸에서 빛이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건곤(乾坤)의 사귐이니, 한번 얻으면 영원히 얻는 묘결이다.
오로지 그 위험됨을 방지하고, 잘 막아서 봉고(封固)하여 조금도 세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온양(溫養)함이다.

6. 온양(溫養: 따뜻하게 잘 기름)
정신이 황방(黃房: 도태가 맺어지는 자리, 黃庭)을 잘 지키면 금태(金胎: 황금빛 도태)가 저절로 이루어진다. 황방(黃房)은 건궁(乾宮)의 아래에 있고, 곤궁(坤宮)의 위에 있다.
24시간 중에 생각 생각마다 규중(規中: 黃庭)에 이르게 하여 빛을 머금고 갈무리하며,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숨을 고요히 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 닭이 계란을 감싸듯 하며, 용이 여의주를 기르듯 하여, 그 근원을 감싸서 하나로 지키면 선천(先天), 원신(元神)의 기운이 서로 시시각각으로 합하여 져서, 점점 서로를 변화시킬 것이다.
단지 정신을 그치고 쉬게 하면 화후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화후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100일이면 그 공력이 신령스러워 질 것이며, 10달이면 태(胎)가 원만해질 것이다. 음백(陰魄)은 저절로 변화될 것이며, 양신(陽神)은 출현할 것이다.
1000일(대략 3년)이 지난 후에는 온양(溫養)의 화후가 족하여서 일체의 음(陰)이 다 벗겨져서, 몸이 순양체로 변하여 영아의 형상이 나타나고 몸 바깥에 몸이 있게 될 것이니, 형체는 연기와 구름과 같고, 정신은 태허(太虛)와 한 가지가 될 것이다.
숨은 즉 형체가 정신으로 돌아가며, 드러난 즉 정신은 기운과 하나가 된다. 일월(日月) 아래를 거닐어도 그림자가 없고, 금석(金石)을 뚫고 지나가도 막힘이 없다. 온양(溫養)을 3년간 한 후에야 영아가 노성(老成)하게 되니, 멀리 가서는 안된다. 그대로 9년을 더해야 태허(太虛)와 더불어 한 몸이 되어, 형체와 정신이 모두 신묘해지고 도(道)와 함께 참 것(眞)으로 합하여지게 된다.
천지(天地) 산천(山川)은 붕괴할 때가 있으나, 나의 도체(道體)는 영겁을 장존(長存)할 수 있다. 인간세계(人間世界)에 숨어 살며, 공적을 쌓고 덕행을 이루어서, 천지(天地)를 이끌고 음양(陰陽)을 붙잡아서, 음양(陰陽)이 사물을 만들 수 없게 하여야 한다.(음양을 초월한 무극無極ㆍ혼원일기混元一氣의 경지에 이름) 천선(天仙)의 도(道)는 여기서 마쳐진다. (佛家의 부처님의 경지이다)


대통경(大通經) 해석

2004. 4. 1  박산 역



先天而生에 生而無形이요
하늘보다 먼저 생겨남에, 생겨 났어도 형상이 없고,

後天而存에 存而無體라.
하늘보다 뒤 남아 있음에, 남아 있어도 형체가 없다.

然而無體면 未嘗存也니
그러나 형체가 없으면, 존재했다고 볼 수 없으니,

故曰不可思議니라.
그러므로 불가사의하다고 하는 것이다.


靜爲之性에 心在其中矣오
고요하면 본성이 되나, 마음이 그 가운데 있고

動爲之心에 性在其中矣라.
움직이면 마음이 되나, 본성이 그 가운데 있다.

心生性滅하고 心滅性現하나니
마음이 나면 본성이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면 본성이 나타나니

如空無常하고 湛然圓滿하니라.
허공과 같아 무상하고, 맑고 고요하여 원만하다.


大道無相故로 內不攝於有하고
대도는 형상이 없으므로, 안으로 그 있음에 붙잡히지 않고

眞性無爲故로 外不生其心하나니
참된 본성은 함이 없으므로, 밖으로 그 마음을 내지 아니하나니

如如自然하여 廣無邊際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체가 되어, 널리 그 끝이 없도다.


對境忘境에 不沈於六賊之魔하고
경계를 대하여 경계를 잊음에, 육적(眼耳鼻舌身意)의 마장에 빠지지 않고

居塵出塵에 不落於萬緣之化하야
티끌에 거하되 티끌을 벗어남에, 온갖 인연의 변화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致靜不動하고 致和不遷하나니
고요함을 이뤄 움직이지 아니하고, 화(和)함을 이뤄 옮기지 아니하나니

慧昭十方에 虛變無爲니라.
지혜는 시방에 비추고, 허공은 변화하되 함이 없도다.

면우(俛宇) 곽종석 선생의 공부법

2003. 10. 17 윤홍식 역

1. 존심(存心: 마음챙김)
마음은 일각(一刻)이라도 챙기지 못해서는 안되니, 천하의 천가지 변동, 만가지 변고와 추함과 어긋남, 요동과 변란이 모두 이 한 마음(一心)을 잘 챙기지 못함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이 없을 때는 마땅히 정신을 바짝 차려서 깨어있게 해야 하니, 어둡고 나태하게 해서는 절대 안된다. (희노애락 미발未發시 수양)
일념(一念)이 막 발동하면 곧바로 그 기미를 성찰(省察)하여 선(善)이면 확충하고 악(惡)이면 막아서, 방탕하고 안일하게 해서는 안된다. (희노애락 이발已發시 수양)
항상 비추어 보아서, 잠시라도 소홀히 하거나 망각해서는 안되니, 이것을 일러 “경敬을 주로 한다(主敬).”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너무 억지로 구속하기를 심하게 하거나, 어쩌다 잠깐 돌이켜보아 그 마음을 챙기고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로 해서는 안 된다.
요령은 오로지 “의도적으로 함과 의도를 두지 않음”의 사이(間)에 있다. 만약 한가한 생각이나 쓸데없는 망상이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끊어 버리고, 바른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2. 치지(致知: 격물치지)
단지 일용사물(日用事物)의 사이에서 그 의리(義理)의 지극히 당연한 바를 관찰하여, 그 정미(精微)한 곡절(曲折)을 극진히 하는 것이야 말로 치지(致知)의 가장 요긴하고 절실한 곳이다.
조그만 힌트라도 얻게 되면 곧바로 책을 보되, 글자 상에서만 이해해서는 절대 안 되니, 반드시 심상(心上)에서 체인해야 한다. 반복하여 정보를 모으고 찾아서 그 종지를 직접 체험하여 쌓아가기를 오래하면 스스로 뭇 이치가 일관되고 융합되어 사안마다 합치되어 가히 형이상학적 경지에 까지 도달될 것이다. 
만약 만물의 표면적인 것에만 골몰하여 공허한 생각만 일삼으면 황홀하기는 할지 모르나, 결코 진실된 앎을 이루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3. 역행(力行: 힘써 행함)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보면 곧 힘을 써서 행하여야 한다. 또한 마땅히 “진실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노력하는 마음이 필경은 해이해지고 소홀해지게 마련이다. 마음이 이미 진실하다면, 또한 마땅히 “자세히 살펴서, 신중하게” 행동을 해야 한다. 
대개 사람이 일용(日用)간에 있어서 반드시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나의 분수(分數) 안에 있는 일이라면, 싫증내거나 권태로워하는 마음이 싹트게 해서는 안된다.
만약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반성하면서 절도있게 하여야 하나, 너무 자잘하게 힘을 쓸 필요는 없다. 이 또한 “양심(養心: 마음을 기름), 지기(持氣: 기운을 조절함)”의 요령이니, 평상시의 행동을 닦지 않으면 무슨 일을 닦으랴.
학문이 만약 다 알기를 기다린 연후에야 행동하여 시험해 볼 수 있다면, 그 앎이란 것은 죽는 날까지 시행될 날 일이 없을 것이다.
단지 마땅히 스스로 힘을 써야 한다. 남만 부러워하고 있을 일이 아니다.


주자(朱子)의 심법(心法) - 주자어류에서

 주자(朱子) 저, 2003. 9. 20 윤홍식 번역 
 

1. 사람이 혼란스러울 때는 마음이 밝지 않다. 자신이 혼란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즉시 마음이 밝아진다.

2. 서암화상 같은 이는 매일 항상 자신에게 “주인공이 또렷한가?”라고 물어 보았고, 또 스스로 “또렷하다”라고 대답하였다. 요즘 학자들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3. 내가 보기에 공부의 핵심은 오직 “정신을 차리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반드시 몸소 체험해서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한다.

4. 몸가짐이 방종한 것은 단지 마음이 어둡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도록 하면 저절로 밝아지고 정신이 밝아지면 자연 몸가짐이 방종하지 않는다.

5. 사람에게는 주재하는 하나의 마음이 있으니, 항상 불러서 일깨워야 한다.

6. 다만 자주 마음을 일깨울 뿐이니, 오래 되면 저절로 익숙해진다.

7. 배우는 사람이 늘 해가 떠오르듯이 이 마음을 일깨운다면, 많은 사사로운 것들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은 본래 밝게 빛나며 넓고 크니, 자신은 다만 조금의 힘을 들여 그것을 일깨우고 보살피기만 하면 된다. 억지로 힘을 들이지 말라. 힘을 들이는 것은 도리어 옳지 않다.

8.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이 또렷이 존재하게 한다면 이미 8,90% 정도는 된 것이다. 도리를 살피다가 막히는 곳이 생기면, 오히려 이 막힌 곳에서 이해해 간다. 학문을 할 때에는 우선 한 곳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 한 가지를 이해할 때에는 우선 이 한 가지만 이해해갈 뿐이다. 걸어갈 때는 오직 걸어가는 데 마음을 두며, 앉을 때는 오직 앉는 데 마음을 둔다.

9. 이제 일상생활에서 한가로울 때 지금 이 순간에 또렷하게 마음을 모으면, 이것이 바로 “희노애락이 발동하지 않는 중(中)”이며, 바로 “온전한 하늘의 이치(天理)”이다. 일이 닥치면 그 옳고 그름을 따르니, 옳은 것은 곧 하늘의 이치이고 그른 것은 하늘의 이치를 어기는 것임을 저절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항상 이렇게 이 마음을 추수려서 모아두면, 곧 저울을 쥐고 사물을 재는 것과 같다.

10. “흩어진 마음을 모으라(求放心)”는 말에 대한 이런저런 논의는 마치 불가와 도가에서 말하는 “입정(入定)”과 같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끝나 버리지만, 우리들은 오히려 이 마음이 주재가 되어 안정될 때 비로소 이것을 바탕으로 바깥일을 하니, 이 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11. 세상에는 단지 선(善)과 악(惡) 이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천지간의 음양을 예로 들어보자. 바람이 온화하고 태양이 따뜻하면 만물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선(善)의 뜻이다. 여러 음(陰)의 기운이 작용하기 시작하면 만물이 시들고 메말라 간다. 사람에게 악(惡)도 그러한 것이다. 천지(天地)의 이치는 원래 음의 기운을 막아서 항상 이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학자는 반드시 선(善)과 악(惡)에 대해 두 경계의 갈림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지, 미세한 악(惡)이라도 끼어들어 선의 단서가 끊어지게 하지 말라.


12. 마음을 텅 비고 고요하게 할 뿐이니, 오래되면 저절로 밝아진다.

13. 사람의 마음은 본래 밝다. 다만, 사물과 일들에 덮이고 가리어 얼굴이 드러난 적이 없기 때문에 도리를 비추기 어려운 것이다. 먼저 덮이고 가리는 것을 걷어내길, 그것이 스스로 드러날 때까지 여러 차례 해 보라. 

14. 사람의 마음은 늘 생각하게 마련이다. 생각할 때는 생각을 해야지, 스스로 억지로 힘들게 억눌러서는 안 된다. 도리어 마음이 고요해지지 않는다.

15. 사람은 온갖 변화에 통달해야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지고 한결같이 모을 수 있다.

16. 항상 정신을 또렷하도록 해야 한다. 오래되면 익숙해져서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자(顔子)는 단지 경(敬)을 지녔을 뿐이다.

17. 사람이 일념으로 깨어있는(敬) 순간, 이 마음은 바로 이 몸에 있게 된다.

18. 마음은 본래 밝은 것이지만, 단지 “이기적 욕구”에 의해 어두워졌을 뿐이다. 이제 학문을 하는 까닭은 그 밝은 것을 더욱 밝히려는 것이다. 마음이 밝으면 이 일에는 이런 도리가 있고, 이 사물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는 것을 자연히 알 수 있다.

19. “경(敬)”이란 단지 이 마음 안에 주인공이 깨어서 주재하는 것이다.

20. “경(敬)”이란 온갖 일들에 손을 놓고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에 따라 정신을 하나로 모으며 조심하고 삼가하며 방종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21. “경(敬)”이란 단지 마음을 거두는 것일 뿐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는 것이다.

22. “경(敬)”이란 단지 삼간다는 뜻이다.

23. 정신을 차리기만 하면 바로 “경(敬)”이 거기에 존재한다.

24. 나도 옛날에는 곧장 도달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원래 다른 방법이 없다. 오직 익숙하게 하는 것뿐이니, 익숙해지면 저절로 “경(敬)”의 상태가 오래 갈 수 있다.

25.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일이 없을 때가 없다. 일이 없다면 죽었을 때뿐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많은 일들이 있다. “일이 많아서 어지러우니 나는 우선 정좌(靜坐)를 하겠다”라고 해서는 안 된다. “경(敬)”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이 앞에 닥쳤는데 스스로 고요해지려고만 하고 완고하게 일에 응하지 않는다면, 바로 마음이 아주 죽어버린 것이다. 일이 없을 때는 경(敬)은 마음속에 있고, 일이 있을 때는 경(敬)은 그 일 위에 있다.

26. 마음을 함양할 때는 반드시 “경(敬)”으로 해야 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반드시 “의(義)”를 쌓아가야 한다.

27. 반드시 한 순간의 생각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아야 한다. 좋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라면 반드시 해야 한다. 혹 이 일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지 못했으면, 반드시 끝까지 생각해야 한다. 좋지 않은 일이면 하지 말라. 스스로 그와 같이 깨닫는 순간 “경(敬)”은 바로 거기에 있다.

28. 그대들이 진보하지 않는 것은 정신과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부가 그렇게 정밀하거나 예리하지 못한 것이다.

29. 모든 것을 내버리고 사물이 이르러도 “내 마음이 간직되어 길러질 때를 기다리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 또 다만 망연하게 다른 사물을 따라가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을 끊어버려야 한다.

30. 일을 만나지 않았을 때는 반드시 마음이 고요해야 한다. 그래야 일에 임해서 마음을 써야 할 때 바로 “힘”이 생긴다.

31 대체로 기질이 속된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 마음이 평정되면 기질은 저절로 조화로워진다.

32. 마음이 올바르게 되어야 ‘성(性)’이 선한 것을 알 수 있다.

33. 배우는 사람의 공부는 우선 저 느닷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잘라 버리는 것이다.

34. 성현의 수많은 말들은 오직 사람들에게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욕(人慾)을 없애라”고 가르친 것이다. 천리에 밝으면 자연히 학문을 강론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본성이 본래 밝은 것은, 마치 보배 구슬이 혼탁한 물에 가라앉으면 밝은 빛이 나지 않다가 혼탁한 물을 제거하면 보배 구슬이 저절로 예전처럼 밝아지는 것과 같다. 스스로 욕심에 가려진 것을 안다면 바로 (천리가) 밝아지는 자리이다. 다만 이 밝아진 곳에서 바짝 노력하여 마음을 챙기면서, 한편으로 사물에서 이치를 알아 갈 뿐이다. 오늘 한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내일 한 사물의 이치를 밝히면, 마치 군사를 보내 성을 함락시키는 것처럼, 인욕이 저절로 녹아 사라질 것이다.

붓다 호흡법의 16법 - 『출입식념경』중에서

2003. 11. 14 윤홍식 번역/해설 
                                  

Ⅰ. 몸(身) - 들숨, 날숨(사마타/위빠사나)

1.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는 것을 잘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길게 내쉰다”는 것을 잘안다.
2. 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는 것을 잘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짧게 내쉰다”는 것을 잘안다.
                                                            (길고 짧은 호흡이 육체에 미치는 영향 관찰함)
3.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며,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쉰다. 
                                                            (호흡과 육체의 상관관계 관찰함)
4.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며, 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쉰다.
                                                            (4선을 통해 호흡으로 육체를 조절하는 법 터득함)


Ⅱ. 느낌(受) - (사마타/위빠사나)

1. 희열(喜)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며, 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쉰다.
                                                            (제2선정에 도달)
2. 행복(樂)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며, 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쉰다.
                                                            (제3선정에 도달)
3. 마음의 작용(느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며, 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쉰다.
                                                            (4선을 통해 느낌 자체의 상태와 조건을이해함)     
4.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며,  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쉰다.
                                                            (4선을 통해 느낌을 조절하는 법을 터득함)
                                                                          


Ⅲ. 마음(心, 생각)- (사마타/위빠사나)

1. 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며, 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쉰다.
                                                             (4선을 통해 마음 자체의 상태와 조건을 이해함) 
2.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며,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쉰다.
                                                             (마음을 만족스러운 상태로 조절하는 법 터득)
3. 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며, 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쉰다.
                                                             (삼매를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는 법 터득)
4.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들이쉬며,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내쉰다.
                                                             (제4선에 들어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법 터득)  


Ⅳ. 법(法) - (위빠사나)

1. 무상(無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며, 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쉰다.
                                                             (모든 조건지어진 사물들이 늘 변화함을 아는 것)
2. 탐욕에서 벗어남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며, 탐욕에서 벗어남을 경험하면서 내쉰다.
                                                             (무상한 사물에 대한 집착들이 점차 느슨해짐)
3. 집착의 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며, 집착의 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쉰다.
                                                             (집착들이 소멸됨)
4. 놓아버림(되돌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며, 놓아버림(되돌림)을 관찰하면서 내쉰다.
                                                             (마음과 사물이 모두 자유로워져서 원상을 회복함)   

예기(禮記) 대동편(大同編)

2003. 9. 26 윤홍식 역(譯)


(공자께서 말씀하시되) 저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때와 삼대(三代: 夏,殷,周)를 나는 보지 못하였으나, 항시 내 마음에 있노라.

대도(大道)가 행해지던 때에는 천하가 공평(公平)해서 현명한 자를 선거하고 재능있는 자를 참여시켜 신의(信義)를 익히고 화목함을 닦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직 그의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오직 그의 자식만을 자식으로 삼지 않았다. 노인에게는 잘 마칠 수 있도록 하여 주었고, 장년에게는 쓰일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어린이에게는 잘 길러질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과부, 고아, 홀아비, 환자들을 불쌍히 여겨서 다 양육을 받게 하였으며, 남자는 직분(職分)을 갖을 수 있게 하였고, 여자는 시집갈 수 있게 하여 주었다.

재화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였으나, 반드시 자신의 소유로 하려하지는 않았다. 힘이 자신의 몸에서 나지 않음을 싫어하였으나, 반드시 자신을 위하여만 쓰려 하지 않았다.

고로 잔대가리(陰謀)는 소멸되서 흥하지 못했으며, 절도(竊盜)나 난적(亂賊)들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문을 열어두고 닫지 않았으니 이를 “대동(大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후로는 대도(大道)가 이미 숨어서 천하는 한 집안(一家)의 소유가 되어 각기 그 부모만을 부도로 여기고, 그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겼다. 재화나 힘은 자신만을 위하여 썼다.

이에 대인(大人)이 세상에 나와서 예(禮)를 만들고 성곽과 도랑을 구축하여 방어하여 지키게 하고, 예의(禮義)를 기강으로 삼아 군신(君臣)간을 바로잡고, 부자(父子)간을 돈독하게 하며, 형제(兄弟)를 화목하게 하고, 부부(夫婦)를 화합하게 하였다. 제도를 설치하여 전리(田里)를 세우고 지혜(知)와 용기(勇)를 숭상케 하였다. 

그러나 그 공적이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었기에, 이로 말미암아 권모술수가 작용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왕, 탕왕, 문왕, 무왕, 주공, 성왕이 이로 말미암아 선출되었다. 이 여섯 군자(君子)는 예(禮)에 있어서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의로움(義)을 드러내고, 그 신의(信義)를 생각하게 하였으며, 그 허물을 밝혀내고, 인(仁)으로 형벌을 내리며, 서로 양보함을 익히게 하였다. 이리하여 백성들에게 상도(常道)가 있음을 보였다. 

이로 말미암지 않는 자로서 집권자는 제거하였으니, 백성들이 재앙으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일러 “소강(小康)”이라고 한다. 


원상을 100% 복원하는 비결[明明의 비결]

2007. 3. 10 윤홍식 저 

 
「중용」 제 1장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명하신 것이
우리의 ‘본성’(原象, 본래 모습)이며,
이것(하느님의 뜻ㆍ원상)을 잘 따르는 것이
인간이 걸어야할 길이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하느님의 뜻'이란 우리가 말하는 '원상'(原象)입니다.
우리는 원상을 밝혀낸다 하면
막연히 무슨 신비체험을 한 사람이나 하는 줄 아나,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삶을 살 때
100% 다시 되 밝혀지는 것입니다.

모든 성인은 '내 뜻'(에고의 욕망)대로 말고
'하느님의 뜻'(사람의 원상)대로 사신 분들이니까요.
그래서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뜻'(로고스, 진리, 빛, 원상)
그대로 사신 분이라는 의미에서
'진리 그자체가 그대로 육신을 지니고 오신 분'이라고 기리는 것이죠.

예수님도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모든 성인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지상에 이루기 위해
성인으로, 혹은 밝은 임금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주기위해서
육신을 가지고 오신 분들입니다.

예전 동방의 성군이시던
순임금께서 우임금께 전한 가르침의 핵심도
"도심(道心-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은 미미하고
인심(人心- 내뜻대로 하는 마음)은 위태위태하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선악'을 정확히 분별해 내면서(精-정밀함)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一, 한결같음)
언제 어디서나 항상 그 '중심'(善- 하느님의 뜻에 치우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정확히 합치되니 中이라고 함)을 잡아라!"는 것일 뿐입니다.

그분들의 삶을 잘 이어받는 사람은
그 사람 역시 성인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하느님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고
매 순간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살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수련시에나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순간에
깨어있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합시다.
"지금 나는 '하느님의 뜻'(원상)에 합치하는가?"
"지금 이 생각은 ‘내 뜻’인가? ‘하느님의 뜻’인가?"라고요.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는 없어요.
지금 이 순간 내가 너무나도 당연히 진리라고 아는 것부터 실천하세요.
그리고 그것을 100% 실천하는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그리하여 이미 알던 것이 100% 내 것이 되고 나면
그 다음 알고 해야 할 것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하느님의 뜻'(원상)부터 시작하여
그것에 온전히 자신을 순복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와 남에게 모두 행복을 주는 것이 ‘선善’이라는 것을 알며
나와 남 모두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악惡’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우주 창생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
여러 창조물에 두루 유익한 선에 있고
악에 있지 않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는 ‘원상’도
‘선’은 원하고 ‘악’을 피하는 것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매순간 생각ㆍ감정ㆍ행위를 할 때
이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 '내 뜻'
즉 "나 하나 잘살자!"는 '에고의 욕망'을 따르면서 
‘하느님 뜻’(원상)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들숨ㆍ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통해
‘깨어있는 마음’을 잘 지키고 유지함으로써,
매 순간 '선'과 '악'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다행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언제 어디서나 '선'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하나씩 개설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퍼지는
'하느님의 목소리' 즉 '양심'만 잘 주시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양심'에 물어 보았을 때
'선'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합치되고, 우리의 '원상'에 합치되는 것이니,
반드시 실천에 옮겨야 할 것이며,
'악'이라고 확신이 드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며, 우리의 '원상'에 위배되는 것이니,
결단코 실천에  옮기지 마십시오!

매 순간, 매일 이것을 실천에 옮기시고,
이것을 습관화 하십시오.
습관화 되지 못한 선행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자꾸 습관화하여 언제 어디서나 무의식적으로
선을 행하고 악을 하지 않는 버릇이 나와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가 우리를 가로막으면
개인적인 편견이나 이해득실을 떠나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지혜’로 이를 극복하며,

타인을 무시하는 ‘아집’이 우리를 가로막으면
내 마음을 비추어 보아 남에게 당해서 좋았던 일은 남에게 베풀고
남에게 당해서 싫었던 일은 남에게 가하지 않는
‘자비ㆍ사랑’으로 이를 극복하십시오!

나날이 무지는 줄어들고 아집은 소멸하며,
나날이 지혜는 밝아지고 자비ㆍ사랑은 증장하는 원상을 밝히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100% ‘하느님의 뜻’ 즉
 ‘원상’ 그대로의 삶을 사는 경지에 도달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 뜻'대로 말고 '하느님 뜻'대로 사는  경지이며,
예전 선비님들이 말하시던 “천리(天理-하느님의 뜻)는 100% 보존하고
사람의 욕심(人慾- 에고의 욕망)은 100% 틀어막아라!”라고 하는 경지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원상-복원’의 극치로서,
원상을 100% 다시 복원해 내는 최고의 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