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3일 일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4. 참된 순결함과 고상함

4. 참된 순결함과 고상함


권세와 이익, 화려함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는 순결하다.
그러나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자는 더욱 순결하다.

모략과 기교를 모르는 자는 고상하다.
그러나 알면서도 쓰지 않는 자가 더욱 고상하다.

勢利紛華 不近者爲潔 近之而不染者爲尤潔
智械機巧 不知者爲高 知之而不用者爲尤高(전집-4장)


사람의 인심(에고의 마음)은
‘권세’를 얻어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며,
‘이익’을 얻어 손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며,
세상에서 추구하는 ‘화려함’을 뽐내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누리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성공적인 삶’입니다.

물론 사람인이상 이러한 기본적인 욕망들은
어느 정도 충족되어야만 살맛이 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자신의 고귀한 ‘양심’을 버리면서까지
추구해야할 것들은 아닙니다.

사람이 ‘권세’를 얻으면
교만해져서 안하무인이 되기 쉽습니다.
완장을 차고 감투를 쓰고서도
눈빛이 달라지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우리는 ‘권세’만 얻으면
남들에게 위대한 존재로 인정을 받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권세만 얻게 되면 우리가 지닌
모든 인간적 약점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철학자 보에티우스가 [철학의 위안]에서
“높은 관직은 그 사람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단점을 더욱 돋보이게 할 뿐이다”라고 하였듯이,

실상은 그 사람이 내면에 감추고 있던
단점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안하무인이 되어 개념 없는 언행을 일삼다가
만고에 처량한 신세가 되기 쉽습니다.

‘이익’을 추구하다보면 절제를 잃게 되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짓밟는
파렴치한이 되기 쉽습니다.

[맹자]에서 이르길
“‘정의’를 뒤로 하고 ‘이익’만을 우선시한다면,
몽땅 다 빼앗지 않고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다보면,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나 자신을 화려하게 포장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속의 화려함은 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함이라,
눈에 보이는 ‘겉의 화려함’만을 추구하게 되어,
우리의 내면은 황폐해지기 쉽습니다.

‘양심’을 오롯이 지켜나가며
내면의 ‘순결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위태롭기만 한 권세, 이익, 화려함을
애초에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순결한 내면’을 지켜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순결한 사람은
‘권세’를 얻더라도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이익’을 얻더라도 이익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화려함’을 얻더라도 내면의 가치를 소중히 합니다.

권세, 이익, 화려함을
멀리 하는 것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권세, 이익, 화려함을 얻더라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더욱 훌륭합니다.

[논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자공이 말하길 ‘가난하되 아첨하지 않으며,
부유하되 교만하지 않으면 어떠합니까?’라고 하였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물론 괜찮다!
그러나 가난하되 즐거우며,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는 자보다는 못하다’라고 하셨다.”

물론 부유하더라도 교만하지 않는 것은 훌륭합니다.
그러나 부유하되 예절을 좋아하여
내면의 양심을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실천하는 자만은 못합니다.
이것이 참다운 군자의 길입니다.

단지 유혹을 방어하는 것으로는
완전한 군자가 되지 못합니다.
적극적으로 유혹에 맞서서 이겨낼 수 있는 자라야
완전한 군자가 될 수 있습니다.

‘모략’과 ‘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략’은 자신의 권세와 이익과 영화를 추구하기 위해
갖은 꾀를 쓰는 것을 말합니다.
‘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묘한 재주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이러한 모략이나 교묘한 재주를 가까이 하는 자는
이러한 독소에 쉽게 오염됩니다.
그리하여 잔꾀에 빠져 자신의 양심을 저버리게 됩니다.

잔꾀가 발달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는 데는 능숙하나,
시야가 짧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한 계산에 능해서,
인류가 함께 생존하지 못하고서는
자신의 이익도 의미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논어]에서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정의’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군자는 다함께 생존할 수 있는 ‘정의’를 추구한다면,
소인은 자신의 생존만을 중시하는 ‘이익’을 추구합니다.
결국 이러한 존재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암세포’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양심을 따르는 고상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모략과 술수를 멀리합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쉽게 타락시키는 것을 알기에,
애초에 이러한 수단들을 공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상한 뜻을 지닌 사람들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양심’을 밝히는 공부를 하는 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양심’은 인간적 욕망보다 미약해보이나,
실제로는 인간적 욕망을 정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자리입니다.

우리가 양심에 지속적인 관심을 주고
올바른 방법으로 배양하기만 한다면,
‘양심’의 미세한 불씨는 태양처럼 광명하게 자라게 될 것이니,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떠한 욕망도 곧장 정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경지를 [논어]에서는
“마음이 욕망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다!”
(從心所欲不踰矩)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위대한 군자를 추구하는 이라면
모략과 술수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모략과 술수를 누구보다 잘 알되 
양심에 어긋날 때는 절대로 쓰지 않을 수 있는 경지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양심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해
권세와 이익, 화려함을 멀리하고,
양심의 고상함을 지키기 위해
모략과 술수를 애초에 알아두지 않는 것은
진실로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양심’을 따르는 삶은
훨씬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양심’으로 ‘욕망’을 완전히 정화할 수 있어야
참된 ‘군자의 길’입니다.

권세와 이익과 화려함을 가까이 해도 물들지 않으며,
모략과 술수를 잘 알면서도 쓰지 않을 수 있어야만,
참다운 군자의 경지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가 걸어온 길 중에
‘군자의 길’만큼 의미 있는 길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내면에 새겨놓은
‘양심의 길’을 걷는 것은,
이 우주에 사람으로 태어나 이룰 수 있는
최고로 순결하고 고상한 길입니다.

유가의 경전 [중용]에서 공자님께서
“군자는 길을 따라 걷다가 길에서 쓰러져야 하니,
나도 그만둘 수가 없다”라고 하였듯이,
이 양심을 따라 살며 나와 남을 두루 살리는
‘군자의 길’을 걷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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