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2 벗이 있어 멀리서 방문하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3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2 벗이 있어 멀리서 방문하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1-1-2)
우리에겐 늘 벗이 있습니다.
벗이 없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벗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서로에게 피해만 끼치는 벗이 있으며
서로 신의를 어기지 않는 정도의 벗도 있고
서로 양심을 계발해주도록 돕는 벗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등교재인
그래서 [논어論語]에서 증자曾子는
“벗으로 인자함을 돕는다”
(以友輔仁)라고 하였으며,
[계몽편啓蒙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그 ‘덕성德性’을 성취하게 되는 것은
진실로 ‘스승과 벗’의 공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비록 그러하나 벗에는 ‘유익한 벗’이 있고,
또 ‘손해가 되는 벗’도 있으니,
벗을 취할 때는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또다른 조선시대의 초등교재인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이르길
“천자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마땅히 ‘벗’으로
덕을 이루지 못한 자가 없으니,
그 정분이 성긴 것 같으나 그 관계가 지극히 친하다”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벗’(朋)은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
서로 양심의 계발을 도와서
‘인자함’(仁)을 이루게 해주는 벗인,
‘도반道伴’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양심을 계발하는 요령을 정확히 배우고(學)
이를 수시로 마음과 몸으로 익히면서(習)
학문의 희열을 느끼는 군자에게 있어서,
같은 길을 가는 ‘도반’(朋)이
멀리서 찾아와서 함께 도담을 나누며,
양심의 희열을 함께 나누고
서로의 양심의 계발을 돕는 것은,
또한 그 자체로 큰 배움이니 그 즐거움이 참으로 큽니다.
양심의 충족에서 오는 벅찬 희열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희열이겠습니까?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이 얼마나 큰 희열이겠습니까?
도반과 함께하는 즐거움은
결국 ‘양심의 희열’에 뿌리를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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