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3일 일요일

[윤홍식의 채근담 강의] 2. 세상에 깊게 물들지 말라

2. 세상에 깊게 물들지 말라


세상을 건너는 것이 얕을수록
오염되는 것이 또한 얕으니,
일을 경험함이 깊을수록
그 술수 또한 깊어진다.

그러므로 군자는 능숙하기보다는
차라리 질박하고 노둔하기를 원하며,
세세한 것을 따지며 신중하기 보다는
차라리 소탈하고 광오하기를 원한다.

涉世淺 點染亦淺 歷事深 機械亦深
故君子與其達練 不若朴魯 與其曲謹 不若疎狂(전집-2장)


흔히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타고난 천연의 ‘양심良心’이 점차 가려지고,
오직 물욕만이 충만하고
물욕을 채우는 술수에만 밝은 ‘속물’로 변해가기 쉽습니다.

유가의 경전 [서경書經]에 ‘마음을 다스리는 요결’을 전하기를,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로우며
도심道心(양심)은 오직 미약하니,
오직 도심을 정밀하게 밝히고 
오직 도심 하나에 충실해야만,
언제 어디서나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라고 하였습니다.

‘도심’은 자연 그대로의 양심이니 '참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며,
우리 마음속에 늘 살아있는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본성 그대로의 마음입니다.

‘인심’은 인간적인 마음이니 '에고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로움을 좋아하고 해로움을 미워하며,
명예로움을 좋아하고 모욕을 미워하며,
물욕과 식욕과 성욕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인 이상 누구나 도심도 있고 인심도 있습니다.
비록 '성인聖人'이라고 할지라도 인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인심 그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단지 선과 악 사이에서 위태로운 마음일 뿐입니다.
위태로운 인심을 안정시켜 항상 선을 이루게 하는 방법은,
늘 마음을 챙겨 깨어있음으로써
미약한 '양심'이 밝게 드러나도록 배양하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마음이 바로 양심이자 도심이니까요.
양심이 훤히 드러나게 되면
선과 악 사이에서 위태롭던 인심이 절로 안정을 찾게 됩니다.

무엇보다 ‘깨어있음’을 통해 ‘양심’을 정밀히 밝히고,
언제 어디서나 ‘양심’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나와 남을 하나로 보며,
남을 나처럼 배려하고 사랑하는 양심적 삶,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추구하는 것이 ‘군자의 길’입니다.

만약 이와 반대로 ‘도심’ 즉 ‘양심’을 저버리고
오직 위태로운 ‘인심’만을 채우려고 노력할 때에는,
위태롭던 인심이 사악한 욕망으로 변하여
반드시 남의 것을 빼앗아 내 욕심을 채운 뒤에야 멈추게 될 것입니다.

심한 경우에는 철저히 ‘물화物化’(사물로 변화함)가 되어,
양심이 아주 드러나지 않게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채근담]은 차라리 세상을 얕게 체험하라고 합니다.
사실 양심을 훤히 밝힐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깊게 건넌다고 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도심의 목소리는 늘 미약하고
인심의 목소리는 늘 강력하니,
차라리 세상을 건너는 것이 얕더라도
양심을 덜 잃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실제 살아보니 이렇더라는 말씀입니다.
세속의 일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일수록,
나와 남을 모두 살리는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남을 밟고 올라서는 ‘술수’만 더해가는 것이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군자는 세속에 능숙하여 양심을 잃고 속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꾸밈이 없어 질박하고 잔꾀를 부리지 않아 노둔하되
양심을 잃지 않는 편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군자는 세속의 세세한 절차에 집착하여 양심을 놓치기보다는,
차라리 텉털하여 소탈하고 뜻만 크고 높아 광오하되
양심을 챙기는 편을 택한다는 것입니다.

철저히 선택의 기준은 ‘양심’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군자’라는 조건을 단 것입니다.
군자는 '세속의 달인이 되는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양심을 밝히는 길'을 걷는 사람이니까요.

군자는 단지 세속의 일에 숙련된 사람도 아니고,
군자는 단지 세세한 일에 치밀한 사람도 아닙니다.
군자는 언제 어디서나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타고난 마음인
‘양심’을 놓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자신의 양심뿐만 아니라
천하의 양심을 일깨울 수 있는 위대한 군자인 '대장부'의 경지에 대해,

“천하의 넓은 곳에 거처하며(인仁, 사랑),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예禮, 예절), 천하의 큰 길을 걷는다(의義, 정의).
뜻을 얻으면(등용되면) 백성과 함께 그 길을 걸으며,
뜻을 얻지 못하면(등용되지 못하면) 홀로 그 길을 걷는다.

부하고 귀함(富貴)으로도 그를 타락시킬 수 없고,
가난하고 천함(貧賤)으로도 그를 움직일 수 없으며,
권위와 무력(威武)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러한 자를 이른바 ‘대장부’라고 한다”([맹자])라고 말하였습니다. 

‘대장부’도 별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양심’(인의예지의 참마음)을 밝히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재산이나 명예 혹은 무력 때문에 양심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일 뿐입니다.

‘대장부’에 뜻을 세운 이들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세상일에 능숙해지기보다는
내가 양심적으로 일처리를 하고 있는가를 냉정히 돌아보아야 하며,
세세한 절차에 집착하고 얽매이기 보다는
내가 양심적으로 남을 대하고 있는가를 냉정히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오늘 내가 한 일 중 양심에 가책을 준 것은 무엇이며
양심이 기뻐한 일은 무엇인지를 냉정히 검토하여,
나날이 양심이 밝아지고 있는지 스스로 반성해볼 일입니다.

‘양심’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날로 세상이 혼탁하게 되는 것은
각자 자신만 살겠다고 서로 ‘술수’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혼탁한 중에도 희망이 있는 것은
남의 아픔도 함께 느끼는 ‘양심’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대장부들이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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