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색을 예쁘게 꾸미는 자 치고
인자한 이가 드물다”라고 하셨다.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1-3)
‘인자함’(仁)이란
남(人)을 나와 똑같이(=)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인자한 사람은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자한 사람은 어떻게
남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양심’에
본래 나와 남의 구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와 남을 갈라 보고
‘나’를 남보다 중시하는
저차원 자아를 ‘에고’라고 합니다.
나와 남을 똑같이 보고
본래 둘이 아니라고 여기는
고차원 자아를 ‘참나’라고 합니다.
참나의 마음이 바로 ‘양심’이며
에고의 마음이 바로 ‘인심’입니다.
그러니 양심을 온전히 회복한 인자한 이가
어떻게 나와 남을 갈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고
나와 남 모두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자한 이가,
어떻게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안색을 예쁘게 꾸밀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말을 교묘하게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고통이 가해지더라도
자신의 이익이 너무나 크고 달콤할 때,
우리는 말을 교묘하게 하여 상대방을 현혹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惡’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7)
안색을 예쁘게 꾸미는 것도 동일합니다.
거짓된 표정을 짓는 것은
남을 속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얻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인자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교묘한 말과 거짓된 안색으로 남을 속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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