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2 벗이 있어 멀리서 방문하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3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3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라고 하셨다.(1-1-3)
그런데 늘 자신을 알아주는 벗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따지는 소인배들은
‘양심의 길’을 걷는 군자를 무시하고 비웃습니다.
[노자]에서 이르길
“뛰어난 선비는 도道를 들으면 부지런히 실천하며
중등의 선비는 도를 들으면 들은 듯 만 듯하며
저열한 선비는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크게 비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에고의 욕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어찌 ‘참나의 양심’을 추구하는
군자의 길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상황을 당한다고 해서
성을 낸다면 군자로서 자격이 없다 하겠습니다.
‘양심의 성냄’이 아닌 ‘에고의 성냄’을 추구하는 것은
군자의 길이 아니니까요.
군자는 ‘양심의 희열’을
자신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사랑ㆍ정의’(仁義)로 배가 불러서
남의 고량진미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복음], 4 :34)라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니 군자는 남에게서 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양심의 만족과 희열’을 원하며
그러한 만족과 희열을 도와주는
‘벗의 방문’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자는 남이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하지 않습니다.
물론 ‘양심의 희열’을 나눌 벗이 많아지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일이며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모욕을 느껴 분노하지 않습니다.
군자가 분노하는 것은 오직 ‘불의不義’
이며 군자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오직 ‘양심의 부끄러움’입니다.
남에게 인정을 받건 인정을 받지 못하건
군자는 늘 내면의 양심의 희열에 가득 차 있습니다.
운문선사의 말처럼
“날마다 좋은 날!”일 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