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술과 기름진 고기, 맵고 단 맛이 참 맛이 아니다.
참 맛은 오직 담백할 뿐이다.
신기한 재주를 지니고 남다른 능력을 지녀야 지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극한 사람은 오직 평상적일 뿐이다.
醴肥辛甘非眞味 眞味只是淡
神奇卓異非至人 至人只是常(전집-7장)
그러나 이런 맛을 계속 먹으라고 하면
금방 질려버리고 맙니다.
밥처럼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담담무미한 맛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자극적인 맛은 달콤하나 오래 가지 못하며,
담백한 맛은 아무런 맛이 없으면서도 오래 갑니다.
우리의 ‘에고의 마음’인 ‘인심’은 언제나 쾌락을 원하니,
늘 달고 기름진 자극적인 맛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인심’은 늘 고통에 허덕입니다.
쾌락은 우리의 욕망을 일시적으로 채워줄 뿐이며,
결국에는 더 큰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참나의 마음’인 ‘도심’은 스스로 만족하니,
늘 담백하고 맛이 없는 맛을 즐깁니다.
그래서 도심은 늘 만족합니다.
[노자]에서 “만족할 줄 아는 자가 부자이다!”라고 하였듯이,
매사에 만족하는 도심은 늘 최고의 행복을 누립니다.
인심이 추구하는 쾌락은 일시적인 쾌락이나,
도심이 추구하는 만족은 절대적인 만족입니다.
자극적인 맛은 일시적인 쾌락을 줄 뿐이나,
담백한 맛은 영원한 만족을 줍니다.
성인이 되고 지인이 되는 공부를 하면서,
정작 추구하는 것은 ‘인심’의 충족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과시할 ‘재주’나 ‘능력’을 쫓는 것입니다.
신기한 재주와 남다른 능력이 왜 필요할까요?
남들에게 존경을 받고, 부귀영화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우리의 ‘인심’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들이니까요.
절대로 이러한 재주나 능력을 얻기 위해 공부하지 않습니다.
참된 ‘지인至人’과 ‘성인聖人’을 추구하는 학인學人은
참된 학인은 도심의 욕구를 충족을 위해 공부하지
인심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공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중용]에서 “공자님께서 말씀하셨다.
은둔하려고만 하고 괴이한 것을 행하는 것을
후세에 칭찬하는 이가 있을지라도,
나는 이러한 짓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공자님과 같은 성인도 자신의 ‘양심’을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신 분일뿐이지,
절대로 남다른 능력이나 재주를 얻어
그래서 성인의 경지에 오를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모든 학인은 이 점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나는 도심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
아니면 나는 인심을 위해 공부를 하는가?”라고
반드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조선의 대학자인 율곡선생께서는 [격몽요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른바 ‘학문’이란 이상하고 특별한 물건이 아니다.
단지 부모가 되어서는 당연히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되어서는 당연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하가 되어서는 당연히 주군에 충성하고,
부부가 되어서는 당연히 서로 역할분담을 잘 하고,
형제가 되어서는 당연히 서로 우애하고,
어린이가 되어서는 당연히 어른을 공경하고,
친구가 되어서는 당연히 신의 있게 하는 것일 뿐이니,
모두 일상생활의 움직이고 고요한 중에
일을 따라 각각 그 ‘당연한 것’을 얻을 뿐이며,
마음을 현묘한 곳으로 치닫게 하여
기이한 효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지극한 사람이 되도록 인도해줄 ‘참된 학문’은,
우리의 ‘인심’을 충족시켜줄
재주나 능력을 닦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정의, 예절과 지혜를 생명으로 하는
우리의 ‘양심’을 자신이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참된 학문입니다.
진실로 ‘지극한 사람’은
신기한 재주나 남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지극한 사람은 양심상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일들을
사사로운 마음 없이 실천하는 사람일뿐입니다.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당연한 직분에 충실하며,
하느님이 주신 ‘양심’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일 뿐입니다.
남들로부터 추앙을 받고자 학문을 닦으신 분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달디 단 술과 기름진 고기를 원하며,
매운 맛이나 단 맛, 짠 맛 등의 자극적인 맛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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